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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동면 시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400470
한자 臨東面示威
영어의미역 Demonstration in Imdong-myeon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임동면 중평리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강윤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항일만세운동
발생(시작)연도/일시 1919년 3월 21일연표보기
종결연도/일시 1919년 3월 21일연표보기
발생(시작)장소 경상북도 안동시 임동면 중평리 편항시장(챗거리장터)
관련인물/단체 유동시|유동태|이균호|유연성|유동수|이강욱|홍명성|박재식|유교희|박진선|유곡란

[정의]

1919년 경상북도 안동 지역의 임동면에서 일어난 3·1만세운동.

[역사적 배경]

경상북도 안동시 임동면정재 류치명(柳致明)의 항일 정신을 이어받은 뚜렷한 지역적 특색을 가지고 있다. 한말에는 위정척사에 터를 둔 의병 활동이 전개되었으며, 1907년부터 협동학교를 세워 민족 의식을 고취해 왔다. 이러한 때에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임동면에서 만세 운동이 펼쳐졌다.

[목적]

거족적인 민족 운동에 동참하여 일제의 강점을 거부하고 자주독립을 찾고자 일으킨 운동이다.

[발단]

임동면 시위는 류동시(柳東蓍)가 1919년 3월 1일 고종 인산에 참가했다가 귀향하면서부터 계획되었다. 류치명의 주손인 류동시는 협동학교를 운영하던 류동태(柳東泰)·이균호(李均鎬)와 만세 운동을 의논하고, 숙부 류연성(柳淵成)과도 협의하였다.

[경과]

거사 계획이 구체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3월 15일 류연성·류동수(柳東洙)·이강욱(李康郁)·홍명성(洪明聖)·박재식(朴載植)·류교희(柳敎熙)·박진선(朴晋先)·류곡란(柳谷蘭) 등이 임동의 편항시장(鞭巷市場, 챗거리장터) 동쪽에 있는 공동 타작마당에 모여 만세 날짜를 3월 21일로 정하고, 각 마을 사람들을 모으는 일을 분담하면서부터였다.

류연성은 대곡동과 위동, 류동수마령동, 박진성과 박재성은 중평동, 류교희는 수곡동과 박곡동, 이강국과 홍명성은 갈전동을 각각 맡아 만세 운동 참여자를 모으기로 하고, 만세 운동을 준비하였다. 거사일인 3월 21일 오후 1시 무렵 기독교인 10여 명이 독립 만세를 부르자 시장에 모인 군중들이 다같이 만세를 외쳤다. 여기서 류연성이 시위대를 이끌었다.

일본 경찰이 이를 막다가 밀려서 주재소로 도망치자 시위대가 주재소로 향하였다. 주재소로 들어간 시위대는 무기를 빼앗고 서류를 파기하였다. 시위대의 기세에 눌린 일본 경찰은 신덕리주재소로 도망하였고, 한층 격렬해진 시위대는 주재소를 부수고, 무기를 모두 우물에 넣었다. 이날 시위는 이튿날 새벽 2시까지 계속되었다.

[결과]

임동면 시위로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된 사람은 69명이었다. 이 가운데 시위를 주도했던 류연성은 7년형, 류동수류교희는 6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1년 이상의 형이 내려진 인물도 15명에 달했다. 또한 안동 지역 최초의 근대식 학교였던 협동학교 학생들이 임동면 시위에 대거 참여하면서 협동학교는 휴교령이 내려졌고, 끝내 폐교되었다.

[의의와 평가]

임동면 3·1만세운동은 3월 22일 임북면 만세운동, 3월 24일 청기면 만세운동, 3월 25일 영양읍 만세운동으로 이어졌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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