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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401990
한자 李滉-陶山書院
영어의미역 Yi Hwang and Dosan Private Confucian Academy
분야 종교/유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윤천근

[개설]

이황(李滉)은 조선 중기, 성리학 문화를 완성하고, 성리학을 학문화한 사람이다. 도산서원퇴계 이황이 만년에 머물러 공부하고 제자를 길러 냈던 도산서당을 기반으로 하여 퇴계 이황이 타계한 후 서원으로 확장 발전한 곳이다. 역사 속에서 이황의 역할은 무수한 제자들을 양성함으로써 시대를 바꾸어 내는 전위대를 등장시킨 데 있다. 도산서당은 교육자 이황이 있게 하였던 바탕이고, 도산서원은 조선 성리학사에서 이황의 역사적 좌표를 확정하여 내는 데 기여하였던 중심적 기관이다.

[성리학과 서원]

이황은 1501년에 태어나 1570년에 세상을 떠났다. 이 시기는 조선 성리학의 학문과 문화가 본격적으로 만들어져 나가던 때이다. 이때를 기점으로 하여 조선은 전과 후로 나뉜다. 전의 조선은 고려 이후의 조선이고, 후의 조선은 조선의 조선이다. 전의 조선은 불교문화와 성리학 문화가 간섭된 조선이고, 후의 조선은 성리학 문화로서의 조선이다.

도산서당은 전 조선과 후 조선을 나누어 놓을 변화의 역량을 만들어 나간 곳이다. 이곳은 서당 영역과 서원 영역으로 나누어질 수 있다. 아래쪽은 서당 영역이다. 만년의 이황은 노구를 이끌고 편안히 드나들 수 있는 곳이면서, 산과 물이 어우러진 공간을 찾았다. 그런 곳에 머물러 공부하면서 교육할 수 있는 집을 짓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찾아낸 터전이 바로 도산 남쪽 기슭이다.

퇴계 이황은 이 산기슭 아래쪽 비탈이 완만한 곳에 서당을 세웠다. 서당 영역은 이 산기슭의 평탄면을 수평으로 이용하며 네 개의 건물이 들어서는 것으로 완성된다. 퇴계 사후, 제자들은 지역의 후생들을 교육할 공간을 마련하고자 하였던 퇴계의 위패를 서당 영역 위쪽에 모셨다. 그리하여 서원 영역은 산기슭 위쪽 조금 경사가 급한 곳에 여러 채의 건물을 들여세우는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그것은 아무래도 공간을 수직으로 이용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황의 가계]

이황은 1501년 온혜의 노송정에서 태어났다. 온혜의 노송정에 처음 터를 잡은 사람은 이황의 할아버지인 이계양(李繼陽)으로, 두루마을에서 분가하여 들어왔다. 이계양은 두 아들을 두었는데, 큰아들은 이식(李埴, 1463~1502), 둘째 아들은 이우(李堣, 1469~1517)이다. 이식은 7남 1녀를 두었다. 첫 부인 문소김씨는 2녀 1남을 두었고, 둘째 부인 춘천박씨는 5남을 두었다.

첫 부인의 소생은 충순위를 지낸 이잠, 예천훈도를 지낸 이하, 신담에게 시집간 딸 등이다. 둘째 부인 춘천박씨의 소생은 관례를 올리기 전에 죽은 이서린, 젊은 나이로 죽은 이의, 문과 급제한 이해, 찰방을 지낸 이점, 문과 급제한 이황 등이다.

이황의 아버지 이식은 과거를 포기하고 자식들을 가르치고 독서하는 것을 주로 하였다. 그 사실은 첫째 부인 문소김씨의 어머니인 남씨의 말을 통해 확인된다. 문소김씨의 아버지는 예조정랑을 지낸 김한철인데, 학자 집안 사람이므로 장서가 많았다. 김한철이 죽자 남씨는 자신의 자식 중에 ‘이 서방’ 같이 책 읽기를 즐기는 사람이 없다 하며, 김한철의 책을 이식에게 가져가게 하였다.

이식이우는 온혜 일원에서 학문으로 이름이 높았다. 이우는 1492년(성종 23) 생원시에 합격하고 1498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우부승지 등의 요직과 진주목사, 안동부사 등을 거쳤다. 이식이황이 아내의 태중에 있던 39세의 나이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1501년(연산군 7) 11월, 이황의 어머니 춘천박씨는 꿈에 공자가 집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그만큼 유학의 큰 성인을 낳고자 하는 의식이 강하였기 때문에 그것이 꿈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여겨진다. 춘천박씨의 꿈 이야기는 오늘날 온혜 종가의 정문에 걸린 ‘성림문(聖臨門)’이라는 현판에 기록되어 있다. ‘성인이 임어하신 문’이라는 뜻이다.

이황이 태어난 온혜 종가는 노송정 종택이라고도 불리는데, 안채의 구조가 독특하다. ‘ㅁ’자 모양의 안채의 내정에는 마치 목젖과도 같이 작은 방 하나가 돌출되어 있다. 그 방 때문에 이 집은 내정이 사라지고, 좁직한 ‘ㄷ’자 모양의 공간만이 남게 되었다. 이 목젖방은 이 집의 안채에 집안 식구들이 다 기거할 수 없자 궁여지책으로 방을 하나 더 달아맨 결과라고 할 터인데, 오늘날 이 방에는 ‘퇴계선생태실’이라는 현판이 달려 있다.

이황은 21세에 의령허씨 묵제 허찬의 딸과 혼인하였다. 허찬은 의령 사람으로, 창계 문경동의 맏딸과 혼인하여 영주 푸실로 와서 살았다. 문경동이황의 숙부 송재 이우와 친교가 있었다. 허씨 부인은 이준·이채 두 아들을 낳았으나, 이황의 나이 27세에 타계하여 영주 외조부 문경동의 묘소 뒤에 묻혔다.

기록에 따르면 이황은 두 부인을 두었다. 두 번째 부인은 풍산 가일의 안동권씨 사락정 권질의 딸이자 화산 권주의 손녀였다. 권주는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유배되었다가 사약을 마시고 세상을 떠났고, 권질은 이때 예안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었다. 권씨 부인이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계속된 옥사에 충격을 받고 정신이 온전치 않게 되어 적당한 혼처를 찾을 수 없었으므로 권질이황에게 부탁한 것이다. 이황은 30세에 권씨 부인을 맞이하여 43세에 여의었다.

[학문과 벼슬살이]

1. 가장 큰 스승, 이우

이황의 학문 연원은 뚜렷하지 않다. 마을의 이웃 노인에게 『천자문』을 배웠다는 기록이 있으나, 본격적인 학문을 가르쳐 준 스승에 대한 기록은 찾을 수 없다. 이황이 살던 온혜 일원에는 이황에 앞선 시대 동향 선배인 이현보, 봉화의 권벌 등이 과거에 급제하였으므로 이들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하여도 이황의 가장 큰 스승은 숙부인 송재 이우였다. 봉화훈도 이계양에서 이식이우 등으로 이어지는 2대의 문학적 염원이 이황의 공부를 실제적으로 이끌어 갔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생활에 대한 지도력은 어머니인 춘천박씨의 몫이었다. 이황은 12세가 되던 해에 숙부 이우로부터 『논어(論語)』를 받아 읽는 것으로 본격적인 공부를 시작한다.

2. 이황 학문의 바탕, 『심경(心經)』

조선 성리학사 속에서 이황 이전은 『소학(小學)』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학문지형을 만들어 낸 것은 길재(吉再)였다. 길재는 고려가 기울어져 가는 것을 탄식하여 금오산에 은거하며 제자들을 길러 내는 일에 전념하였다. 길재가 길러 낸 제자들은 조선 초기 사상사 속에서 전기 사림파의 학맥을 일구어 냈다. 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조광조로 이어지는 전기 사림파 학맥은 ‘몸으로 실천하는 의리’를 표명하였다.

이황은 선배들의 이와 같은 학문 지형 위에 ‘성리학적 마음 수양’을 더하였다. 그 첫 걸음이 된 것이 『심경』의 발견이었다. 이황은 성균관 유학 시절에 ‘상사 황공’으로부터 『심경』을 전해 받았다고 한다. 이 일은 아마도 이황이 33세 때인 두 번째 성균관 유학 시절에 있었다고 판단되는데, 상사 황공이 누구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 『심경』과의 만남은 이황 학문의 성격을 결정짓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황은 평생 새벽같이 일어나서 맨 처음 『심경』을 외우는 일로 하루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황은 『심경』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가 『심경』을 얻고 나서야 비로소 심학의 연원과 심법의 정미함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평생토록 이 글을 신명처럼 믿었으며, 엄부처럼 공경하였다.” 이황의 학문이 『심경』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알게 해 주는 대목이다.

3. 벼슬살이

이황은 34세 되던 해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로 벼슬살이를 시작하였다. 이황의 벼슬살이는 어머니의 소망을 반영한 것이다. 어머니는 이황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한다. “형편상 너는 벼슬을 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네가 벼슬을 한다면 고을살이를 하는 것은 좋을 것이나 고관이 되는 것은 적합하지 않으리라.” 이황의 품성의 일단을 알게 해 주는 말이다.

이황은 다른 이들과 사귀기가 쉽지 않은 맑고 꼬장꼬장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그러므로 높은 벼슬을 하여 다른 이들과 부대끼기보다는 지방관으로 나아가 조용히 자신을 구현하는 것이 더 좋겠다고 어머니가 판단했을 것이다. 결국 훗날 이황이 지방관을 자청한 것도 이러한 어머니의 유훈과도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훈구파와 사림파의 충돌, 사화]

1. 기묘사화와 을사사화

이황의 시대도 사화(士禍)의 시기였다. 이황은 청년 시절에 기묘사화(己卯士禍)를 겪었고, 관인으로서는 을사사화(乙巳士禍)를 겪었다. 이황의 형 이해(李瀣)는 동궁 시절의 인종을 모신 근신으로, 인종이 처음 즉위하였을 때 이기(李芑)를 우의정에 임명하는 문제를 놓고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이를 반대하였는데, 이해가 이때 대사헌에 있었으므로 이기의 원한을 사게 되었다.

1년도 채 되지 않았던 인종 시대가 지나고 명종이 즉위하자 권력은 문정대비, 윤원형(尹元衡) 등에게 집중되었다. 이기윤원형 세력의 한 축을 형성하여 재상으로 임명되었다. 윤원형은 첩 정난정을 시켜 문정대비에게 윤임(尹任) 계열이 역모를 꾀한다는 무고하여, 윤원형 계열의 소윤파가 윤임 계열의 대윤파를 일거에 몰락시킨 이른바 을사사화를 일으켰다.

1545년(명종 즉위년) 8월에 일어난 을사사화의 광풍은 이황 형제를 피해 갔으나, 10월에 이르러 이기이황을 죄 있는 사람 중 하나로 지목하였다. 이황은 지인들의 도움으로 구원되었지만 엄청난 충격을 받아, 이후 조정에서 물러나는 것을 심각하게 고려하였고, 결국 휴가를 청하여 고향인 온혜로 내려오게 되었다.

2. 이황의 칩거

1545년 이황은 을사사화의 광풍을 피해 지산와사로 돌아왔으나, 그곳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10년 넘게 정을 붙이고 살았던 부인의 죽음으로 비어 버린 집이었다. 이황은 더욱 의기소침하여지고, 더욱 세상에 대한 관심을 잃어 갔다. 이황은 사람들의 출입이 빈번한 지산와사를 떠나 온계의 아래쪽에 있는 한적한 토계의 끝자락에 옮겨 작은 집을 짓고, 개울가에 물러나 앉았다는 의미로 호를 ‘퇴계’라 지었다.

한적한 곳으로 물러나 앉는 마음은 이때 지은 「동암언지(東巖言志)」에 잘 나타나 있다. “동편 높은 멧기슭에 새로이 집 지었으니/ 서고 누운 바위들이 모두 그윽하여라/ 내와 구름 아득한 메 사이에서 늙어 가니/ 시냇물 빙 둘러서 들판으로 흘러가네/ 만 권 서적 사이 이 생애 의탁함이 기쁘구나/ 한 보습 이 마음이 무엇을 구하리오/ 시승을 만나거든 정녕 이 말을 마오/ 참으로 쉼이 아니라 병나서 쉬는 것이라네.”

이황의 칩거는 1547년까지 계속되었다. 중간에 안동부사 직이 내려졌지만 나아가지 않다가 1547년 홍문관응교 직이 주어지자 할 수 없이 상경하게 되었다. 9월 중순이 넘어 길을 떠났는데, 이때는 양재역에 나붙은 문정대비 비판 벽서로부터 정미년의 옥사가 시작된 때였다.

이황이 조정에 들어갔을 때는 조정이 온통 중종희빈홍씨 사이에 낳은 아들인 봉성군 치죄 문제로 들끓고 있었다. 삼사 합동으로 봉성군을 처단하라는 주청이 올라갔는데, 이황도 거기 섞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이 이황의 약점이 되었다. 나아갈 수밖에 없었으나, 나아간 시기가 아주 좋지 않았던 것이다.

[어머니의 유훈을 받들어 지방관을 자청하다]

조정은 용담호혈이었다. 윤원형의 권력욕이 일으키는 크고 작은 옥사가 을사년에서 정미년으로 이어지면서 계속되었다. 권력 투쟁에 염증을 느낀 이황은 어머니의 유훈대로 지방관을 자청하였다 48세 되는 해 정월 단양군수 직이 주어지자 이황은 나르듯 달려갔다. 그런데 같은 해에 10월 형 이해가 충청도관찰사로 보임되자, 형제를 같은 관할 지역에 둘 수는 없는 일이었으므로 이황에게 다시 풍기군수에 제수되었다.

단양군의 아전들은 이임하는 군수 이황에게 관아의 밭에서 기른 마대 한 지게를 선물로 내놓았다. 관례에 따르면 이임하는 관장의 노자로 쓰는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이황은 관례라 하여 재물을 취할 수는 없는 일이라며 거절하였다. 그의 봇짐 속에는 오직 단양의 괴석 두 개가 들어 있을 따름이었다.

[백운동서원과의 만남]

풍기로 내려온 이황은 백운동서원과 운명의 조우를 하게 되었다. 백운동서원은 1541년 무릉 주세붕(周世鵬)안향(安珦)을 배향하는 사우를 지은 것이 시초이다. 1543년(중종 38) 주세붕은 사우로 만족하지 않고 그 자리에 다시 백운동서원을 세웠다. 지역 선현을 제사하고 지역 인재를 모아 강학하는, 지역 사림 주도의 새로운 교육기관이 등장한 것이다.

1546년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한 안현은 백운동서원에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여 준다. 그런 상황에서 이황이 군수로 부임한 것이다. 군수 이황은 서원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관의 일이 끝나면 서원에 나아가 직접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향교가 지역의 중등 교육기관이라면, 서원은 지역의 고등 교육기관이 되는 조선 후기의 문화 지형은 여기서부터 비롯되었다.

백운동서원 시절 이황배순이라는 대장장이를 가르치기도 하였다. 천인인 배순의 향학열을 이황이 높이 사서, 지역 사림의 자제들 사이에 섞여 가르침을 받도록 허용한 것이다. 이황이 풍기를 떠나자 배순은 쇠를 녹여 이황의 모습을 만들어 놓고 아침저녁으로 향을 피운 후 그 앞에서 책을 읽었고, 20년 뒤 이황이 타계하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3년 상복을 입고, 이황의 철상을 모셔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다시 은거를 꿈꾸다]

지역 수령은 조정과 권력을 떠나 백성을 만나는 자리이다. 이황은 백성을 만나는 자리에서 실제적인 백성의 구원, 구체적인 치세를 고민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이황은 새로 출범한 백운동서원에 주목하고, 이후 서원은 조선의 문화를 만들어 나가는 데 선구적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주세붕이 송나라 시대에 유행하였던 이 문화를 발견하였다면, 이황은 그 발견을 이어받아 조선의 시대적 문화로 만들어 간 것이다.

이황은 다시 은거를 꿈꾸었다. 물러나 가르치기, 평생 마음속에 묻어 두었던 소망이 새로이 분출하게 된 계기는 분명 백운동서원 탓이었다. 이황은 거듭 사직 상소를 올리는 한편, 경상도관찰사 심통원에게는 백운동서원을 사액사원으로 하여 주기를 청하는 글을 올린다.

49세 되는 해 겨울, 세 번 사직 상소를 올린 뒤 이황은 왕의 윤허가 떨어지기 전에 짐을 꾸려 풍기를 떠났다. 풍기군수로 1년 2개월을 재직한 후였고, 34세에 벼슬살이를 시작한 지 15년이 되는 해의 일이었다. 고향으로 향하는 이황의 짐 보따리는 책궤 두 짝이 전부였다. 궤는 관의 물건이라 하여 뒤에 되돌려 보냈다. 이황이 풍기를 떠난 뒤 백운동서원은 소수서원으로 사액되었다.

1. 한서암 시기

조정의 윤허 없이 임지를 떠났으므로 이황에게는 고신 박탈에 2등급 강등의 벌이 내려졌다. 고향으로 돌아오니 집은 퇴락해 있었다. 1550년 2월 이황은 여러 곳을 전전한 끝에 퇴계의 서쪽 상계로 들어와 집을 짓기 시작하였다. 집이 완공되자 이황은 ‘빈한한 처지로 물러나 숨어 사는 곳’이라는 뜻을 담아 ‘한서암’이라 이름을 짓고, 당의 이름은 ‘고요히 익힌다’는 뜻으로 ‘정습당’이라 하였다.

퇴계로 물러나 앉으며 이황은 다음과 같은 시를 썼다. “몸이 물러남은 못난 분수에 만족함이나/ 배움에서 물러남은 늙어 노쇠함을 걱정함이네/ 퇴계 위쪽에 비로소 자리 잡고 살게 되었으니/ 흐르는 물 바라보며 매일같이 성찰하리라.” 4월에는 한서암 앞에 방당(方塘)을 파고 광영당이라 하였다. 빛 그림자가 어리는 못이란 뜻이다.

2. 계상서당 시기

풍기군수를 내던지고 돌아와 한서암에 칩거하자 학생들이 찾아와 가르침을 청하였다. 학생들은 시내 북쪽에 머물면서 시내를 건너 한서암으로 와서 배웠다. 그러나 한서암은 오래 유지되지 못하고 약 1년 만에 금방 퇴락하여 무너졌으므로 시내 북쪽으로 옮겨 지었다.

여기에도 앞에 방당을 파고 세 갈래 길을 열었다. 세 갈래 길은 도연명이 「귀거래사(歸去來辭)」에서 묘사함으로써 은거와 청빈에 대한 동아시아의 문화적 상징이 되었다. 북쪽의 한서암은 계상서당으로 일컬어졌다. 한서암은 서쪽에서 약 1년, 북쪽에서 약 9년 등 10여 년의 성상을 버텨 냈고, 이황의 많은 초년 제자들이 이곳에서 배출되었다.

[학문의 조선을 연 이황과 이이]

조선 성리학사는 이황이이(李珥, 1536~1584)로 양분된다. 두 사람은 두 세대를 연이어 태어나서 학파의 시대 조선, 학문의 시대 조선을 여는 주역이 되었다. 1558년(명종 13), 이황이 아직 계상서당에 살고 있을 때 22세의 이이사인당 노경린의 딸과 혼인을 하였다. 당시 노경린은 성주목사로 재직 중이었는데, 10년 전에는 양진암 시대의 이황을 찾아온 적이 있었다.

이이는 혼인한 이듬해 성주로 장인을 찾아갔다가 돌아가면서 이황을 찾아갔다. 이이는 다음과 같은 시 한 수를 지어 자신의 마음을 전하였다. “시내는 나누어지니 수수와 사수로 갈라지고/ 봉우리는 빼어나니 무이산이라/ 천 권 경서에서 활로를 찾고/ 몇 칸 누옥에서 살아간다네/ 옷자락 속 품은 생각 펼쳐 내면 맑은 달이 뜨고/ 웃으며 얘기하니 미친 난초 잎조차 조용해지네/ 어린아이 찾아와 도를 얻어 듣기 바랐더니/ 반나절 한가함조차 훔쳐 갈 수 없어라.”

이에 이황은 역시 시 한수를 지어 이렇게 답하였다. “병든 내가 문을 막고 숨어 봄을 만나 볼 수 없었으니/ 그대 찾아와 막힌 문 깨치고 몸과 마음 깨워 주네/ 높은 이름 얻은 이 중 못난 선비 없음 알았어라/ 젊은 날 몸 공부 소홀히 한 게 부끄러워/ 좋은 낱알 거두려면 돌피가 익게 해선 안 되고/ 티끌 사이에서 노닐다간 거울 닦을 사이 없어라/ 너무 감상적인 시어는 잘라내 버리듯이/ 각자 몸 가까운 데서부터 힘쓰고 닦을 일이네.” 가르치고 가르침 받음이 이보다 더 곡진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교육자 이황과 도산서당]

계상서당이 퇴락하여 다시 옮겨갈 처지가 되자, 이황은 본격적인 강학을 위한 열망을 실현하고자 더욱 넓은 강학 터를 찾아 나섰다. “내가 사는 이곳은 매우 궁벽한 곳이어서 비록 물과 돌은 있지만 올라가 멀리 바라볼 수 있는 빼어난 경관은 없습니다. 근래 특별히 한 곳을 잡았는데 자못 경치가 좋습니다. 그래서 한 칸 서재를 지어 편안히 앉아서 여생을 끝마치려고 생각하고 있지만 재력이 워낙 없다 보니 그 뜻을 성취할 수 있을지 없을지 기필할 수 없습니다.” 이황이 1558년 남시보에게 보낸 서신의 일절이다. 1558년부터 본격적으로 도산서당을 짓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 도산 남쪽 기슭에 지은 건물은 창랑대였다. 승려 법연이 공사를 맡아 시작하였고, 나중에는 승려 정일이 이어서 맡았다. 도산서당이 완공된 뒤 이황은 이렇게 적고 있다.

“……정일이 이어받아서 정사로부터 신유에 이르기까지 다섯 해 만에 당이니 사니 하는 두 집이 대략 이룩되어 머물 수 있게 되었다. 당은 3칸인데 1칸은 ‘완락재’이니, 이는 주 선생(주자)의 「명당실기」 중에 ‘즐겨 완상하며 일생을 마친다 하여도 싫증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라는 구절에서 따 온 말이다. 동쪽의 1칸은 ‘암서헌’이니, 운곡 시의 ‘스스로 신실하여지려고 오래 노력하였어도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하였으므로 바위틈에 숨어 살면서 조금 보탬이 있기를 바라노라’라는 말에서 글자를 따온 것이다. 그러고는 또 합하여 도산서당이라 하였다.”

도산서당은 이황이 기거하며 공부하고 가르치던 집이다. 이 집은 특히 암서헌 동쪽 끝에 달아맨 살평상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살평상은 이황이 제자인 이덕홍(李德弘)의 조부 이현우의 집에서 배워서 가지고 온 것이다.

이현우의 집은 비좁아서 처마 밑에 방을 하나 달아매 사용하였다. 이황은 그것을 보고 검소함에 찬탄을 금치 못하여 ‘모름지기 선비란 이리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 처마 밑에 달아맨 방을 여기 서당의 한쪽에 가져다 놓은 것이다. 그러니까 살평상은 이황이 욕심내지 않고 선비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향도(嚮導)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일종의 스승인 셈이었다. 도산서당은 1560년 11월에 완성되었다.

1. 농운정사

이황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사가 모두 여덟 칸인데, 재의 이름은 시습이요, 요의 이름은 지숙이요, 헌은 관란이라 하고, 합하여 농운정사라 하였다.” 이황은 처음에 국자 모양으로 짓기를 바랐으나 법연은 도투마리집 형식을 생각하였고, 정일에 의해 완성된 집은 법연이 생각하였던 대로였다.

농운정사는 학생들이 기숙하며 공부할 수 있는 공간으로 설계되었다. 이 집이 ‘공(工)’자 모양을 갖추고 있는 것은 학생들의 공부가 성취되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공(工)’자가 옆으로 누워 있는 형상으로, 동쪽의 도산서당 쪽에서 서쪽을 바라보고 쓴 글씨인 것이다.

‘공(工)’자 모양의 아래쪽 일선, 그러니까 도산서당 쪽 일선에는 남쪽으로 튀어나온 부분에 작은 사각 마루방이 마련되어 있는데, 그곳이 시습재이다. 그 반대쪽인 위쪽 일선의 남쪽으로 자리 잡은 마루방은 관란헌이다. 이곳에서는 전에 낙강의 굽어 도는 물줄기가 잘 보였다고 한다. 오늘날은 호수로 바뀌어 옛날 정취를 느낄 수는 없다. 중앙에 일선으로 내려 그는 것은 지숙요이다. 이곳은 주로 서당에 공부하러 온 학생들 중에서 나이 많은 축이 머물렀다고 한다. 1561년 완성되었다.

2. 역락서재

농운정사의 아래쪽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역락서재이다. 이황의 제자인 정사성이 입학할 때 정사성의 아버지가 지어서 기부한 건물이다. 앞면 3칸, 옆면 1칸의 단정한 건물로 앞에는 쪽마루를 달았다. 앞에서는 3칸의 형식을 갖추었으나 서쪽 끝 반 칸 정도에 아궁이가 달린 헛간을 설치하여 실제로는 2칸 반의 규모라고 할 수 있다. 이곳은 도산서당에 공부하러 온 학생들 중에서 나이 어린 축이 주로 묵었다.

[기대승과 사단칠정논쟁]

사단칠정설은 조선 성리학을 학문의 시대로, 학파의 시대로 이끈 논쟁이다. 이 논쟁을 통하여 조선은 본격적으로 주희(朱熹)의 설을 설명하고 해석하는 시기로 접어들게 되었다. 사단칠정설의 실마리가 된 것은 1553년 김안국(金安國)의 문도인 추만 정지운(鄭之雲)이 자신이 저술한 『천명도설(天命圖說)』을 이황의 수정을 받은 데서 비롯되었다. 당시 이황은 서울 서성에 셋집을 얻어 살았고, 정지운은 경기도 고양에 살고 있었다.

정지운은 『천명도설』에서 “4단은 이에서 발하고, 7정은 기에서 발한다(四端發於理, 七情發於氣).”고 적었다. 이황은 이 점에 문제가 있다고 보았다. ‘어(於)’란 ‘이’와 ‘기’의 실체적 독자성을 의미하지 않는가? 이황은 이 구절을 ‘4단은 이의 발이고, 칠정은 기의 발(四端理之發 七情氣之發)’이라고 바꾸었다. 이황은 또 친히 『천명도설』에 서문인 「천명신도」를 써 주기도 하였다.

1558년 32세의 기대승(奇大升)은 전라도 광주를 떠나 고향인 고양으로 올라왔다. 8월에 고양으로 올라온 기대승은 10월에 문과 을과에 1등으로 합격하였고, 이때 이황을 만나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 두 사람은 사단칠정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으므로 기대승이 동향의 선배 정지운을 만나는 것은 이때 이후로 보아야 한다. 기대승은 1558년 11월 광주로 돌아갔고, 이황은 1559년 2월 퇴계로 돌아왔다. 이러한 시간표들은 기대승정지운을 만나는 것이 1558년 10월과 11월 사이임을 알려 준다.

1559년 기대승은 「사단칠정설」을 써서 정지운에게 보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이황은 ‘사단칠정설’에 대한 생각을 써 보내고, 기대승은 답신과 함께 자신이 기왕에 썼던 글을 보낸다. 그리하여 사단칠정설에 대한 서신이 두 사람 사이에 직접 오가기 시작하였다.

기대승 의견의 핵심은 ‘사단’과 ‘칠정’은 각각 ‘이’와 ‘기’에 분속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와 ‘기’는 구분되는 둘이 아니라 ‘나누어질 수도 없고, 나누어지지 않을 수도 없는’ 2물 1체, 1체 2물이기 때문이다. ‘이기’가 나뉠 수 없다는 것은 ‘기’가 실체인 데 비해 ‘이’는 실체가 아니라는 점을 의미한다. ‘이기’가 나누어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은 기운이 실체인 데 비해 이치는 기운에 아주 부속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의미한다.

‘사단’을 ‘칠정’과 구분하여 전자를 ‘이’에 분속시키는 것은 ‘칠정’이 일반적인 정서인 데 비해서 ‘사단’을 도덕적인 정서로 보아, 인간은 그 본성 속에 이미 강한 도덕적 지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선언하는 의미를 갖는다. 기대승이 ‘이’와 ‘기’를 분리될 수 없는 것이라는 점에 주목하고, ‘사단’ 역시 ‘칠정’과 마찬가지로 ‘이’나 ‘기’ 양자와 연계되어 움직일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기설’의 존재론적 일면에 치중하는 것이다.

이황이 ‘이’와 ‘기’를 분리될 수 있는 것이라는 점에 주목하고, ‘칠정’이 일반적인 정서로서 ‘이기’ 양자와 처음부터 관계를 맺는 데 비해 ‘사단’을 순선한 것으로 처음에는 ‘이’만의 발현이라 보는 것은, 도덕론·수양론에 치중하여 생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기대승의 존재론적 반론에 대해 ‘사단’을 이치의 발용에 기운이 타는 것으로, ‘칠정’을 기운의 발용에 이치가 타는 것이라고 조정하는 이황은, 일견 ‘이’와 ‘기’ 사이의 ‘나뉠 수 없고 합할 수 없다’는 상호 관계를 인정하고 있기는 하나, 여전히 ‘이치의 발용’이라는 상황을 포기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 준다고 할 수도 있다.

이황이 강조하여 보고 있는 점이 ‘있음’의 문제가 아니라 ‘행위’의 문제였음을 알려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기대승의 반론에서 표명됐던 의식은 그대로 훗날 이이의 것이 됨으로써, 이황 계열과 이이 계열은 학문적 입장의 차이를 갖고 성장 발전하게 된다.

[이황 성리학의 집대성, 『성학십도』]

1568년 명종이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자 중종의 손자인 덕흥대원군의 셋째 아들 하성군(선조)이 즉위하였다. 이황은 17세의 어린 임금이 그를 가까이 두고자 하므로 조정에 나아갔으나 포부를 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이황은 임금에게 당장 힘써야 할 일을 ‘인과 효를 온전히 할 것’, ‘양궁을 친하게 할 것’, ‘성학을 돈독히 하여 정치의 근본을 세울 것’, ‘도술을 밝혀 인심을 바로잡을 것’, ‘신하들을 미루어서 생각하고 귀와 눈을 다 바르게 활용할 것’, ‘수심과 반성을 열심히 하여 하늘의 사랑을 이어받을 것’ 등 6조로 요약하여 올리고, 4개월 뒤 유학의 핵심적 부분을 그림과 설명을 곁들여 해석한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올렸다. 『성학십도』이황의 성리학적 공부를 집대성한 것으로, 이 책을 임금의 공부 자료로 진상하는 행위에는 정치를 공부로 이해하는 유학의 사회 철학적 의식이 전제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까지 육신과 정신의 고결함을 지킨 이황]

1570년 이황은 온혜의 종가에서 시향을 올릴 때 한질이 시작되어 자리보전하고 눕게 되자 손 가까이 두고 지내던 매화 분을 치우게 하였다. 매화는 깨끗함과 절개를 가르쳐 주던 벗이었다. 깨끗한 벗에게 자신의 더러움을 보여 주는 것을 이황은 참을 수 없었다.

육신의 고결함을 지키려는 이황의 노력은 정신의 깨끗함을 지키려는 노력과 동일 선상에 놓여 있었다. 평생을 전전긍긍하였던 이황의 삶의 방식이 매화 분을 치우게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설명될 수 있을 터이다. “국장을 하지 말아라.”, “유밀과를 쓰지 말아라.”, “비석을 쓰지 말아라. 그저 작은 돌을 세우고 표면에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는 몇 자만 쓰라.” 등의 몇 가지 유훈을 남기고 12월 8일 70평생의 삶을 마무리하였다.

[도산서원]

1570년 퇴계 이황이 세상을 떠나자 이때부터 도선서원 만들기는 오랜 세월을 두고 서서히 이루어졌다. 1572년 지역 유림에서 사당을 지어 이황의 위패를 봉안하기로 결정하였는데, 1574년에야 사당을 짓고 강학소인 전교당(典敎堂)과 기숙사인 동재·서재를 완성하였다.

1575년 서원이 낙성되어 도산서원으로 사액되었는데, 전교당 정면에 걸린 현판은 조선 중기의 명필 한석봉의 글씨이다. 1576년 서원이 공식적으로 완공되고 이황의 위패가 서원 사당인 상덕사(尙德祠)에 봉안되었으며, 이황에게 문순(文純)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1615년에는 월천 조목이 종향되었다. 1819년 도산서원 정문 동쪽에 자리 잡고 있는 동광명실이, 1930년 서쪽에 자리 잡은 서광명실이 완공되었다.

1. 전교당

도산서원 전교당은 강학 공간의 중심으로 앞면 4칸, 옆면 2칸의 규모이다. 서쪽의 앞면 1칸, 옆면 2칸은 방으로 원장이 기거하는 곳이며, 나머지 앞면 3칸, 옆면 2칸은 앞면이 트여 있는 마루방이다.

전교당은 넓은 석재 4단과 좁은 석재 1단 등 모두 5단으로 쌓은 대좌 위에 자리를 잡았다. 제2칸과 제3칸 앞의 석단 앞으로는 마당으로부터 오르는 7단의 계단을 나란히 두었다. ‘도산서원’ 현판이 달려 있는 방은 동쪽으로부터 제2칸 처마 밑이고, 도산서원 현판 뒤쪽으로는 마루방의 뒤쪽 끝에 ‘전교당’이라는 현판이 앞뒤로 줄을 맞추어 달려 있다.

전교당 아래 펼쳐져 있는 마당의 동서 양 끝으로는 전교당과 90도 각도로 서원의 학생들이 기숙하는 건물 두 채가 벌려 서 있다. 동쪽 끝에 서 있는 건물은 박약재(博約齋)이고, 서쪽 끝에 서 있는 건물은 홍의재(弘毅齋)이다. 전교당에서 정면으로 내려다보이는 마당의 끝 지점에는 서원 영역으로 들어오는 진도문(進道門)이 있고, 진도문 좌우에 동광명실과 서광명실이다. 광명실은 책의 보관을 위해 건립된 누각식 건물이다. 경사면을 이용하여 지었으므로 밖에서 보면 누각이지만 안에서 보면 누각이 아니다.

2. 상덕사

서원의 기능은 강학 기능과 제향 기능으로 대표된다. 상덕사도산서원에서 지역 선현을 제사하며 그 덕을 기리는 제향 기능을 수행하는 곳으로, 퇴계 이황을 주향으로 하고 월천 조목을 종향으로 한다. 상덕사 건물은 앞면 3칸, 옆면 1칸의 작은 건물이다. 앞쪽에 길게 처마를 빼고 기둥을 앞으로 두어 빈 곳을 만들어 두고 있는 것까지 치면 옆면 1칸 반의 규모이다.

[시사단]

당쟁이 격화되자 영조는 탕평책을 실시하였으나 크게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노론의 지원을 받아 성립된 영조의 권력이었으므로 명실상부한 탕평을 추구하기는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탕평책은 정조에게 계승되었다. 정조는 더욱 적극적인 탕평을 추구하였다. 조정에는 남인 계열도 일부 참여하고 있었다. 남인 계열인 번암 채제공(蔡濟恭)은 그런 정조 시대의 상징이라 할 수 있었다.

정조는 남인의 영수인 퇴계 이황에 대한 존경심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그것은 영남의 인재를 구하기 위한 도산서원에서 과거를 보는 도산별시로 표현된다. 당시 도산별시에는 수많은 영남의 인재가 모여들어 서원에 다 수용할 수 없었다. 그래서 과거시험장을 강가로 옮기고 두 개 소나무 사이에 과제를 걸었는데, 지금 그것은 시사단(試士壇)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시사단도산서원 맞은편 강 건너 석축 위에 있는 비각이다. 1792년(정조 16) 정조가 규장각 각신(閣臣) 이만수(李晩秀)도산서원에 보내어 과시(科試)를 보인 곳이다. 정조의 제문으로 올리는 서원의 제향에는 7,228명의 선비가 참여하였다 하고, 과거 시험에 답안지를 낸 사람이 3,632명이었다고 한다. 정조는 그중에서 급제 2명, 진사 2명, 초시 7명을 뽑았다.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과제가 걸렸던 자리에는 단을 쌓고 비석을 세웠으며, 비문은 번암 채제공이 지었다. “도산(陶山) 물 양양(洋洋)히 흘러 그 위에 단(壇)이로다/ 단(壇)에 계급(階級)이 있고 물엔 연원(淵源)이 있나니/ 단(壇)에 오르고 물에 임(臨)함에 류(類)를 따라 뜻을 펴노니 /선생(先生)의 덕화(德化)요 임금님의 은혜이다.” 안동댐이 건설되면서 시사단이 물에 묻힐 처지가 되자 단을 더 올려 수면 위로 솟게 하여 오늘에 이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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