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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401429
한자 李德弘
영어음역 Yi Deokhong
이칭/별칭 굉중(宏仲),간재(艮齋)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배종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출신지 경상북도 영주시 장수면 호문리
성별
생년 1541년연표보기
몰년 1596년연표보기
본관 영천
대표관직 영춘현감

[정의]

조선 전기 안동 지역에서 활동한 문신.

[가계]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굉중(宏仲), 호는 간재(艮齋). 증조부는 이흠(李欽), 할아버지는 습독(習讀) 이현우(李賢佑), 아버지는 이충량(李忠樑), 어머니는 반남박씨(潘南朴氏)로 박승장(朴承張)의 딸이다.

[활동사항]

이덕홍은 영주(榮州) 남촌(南村) 구룡동(九龍洞, 현 경상북도 영주시 장수면 호문리) 외할아버지 박승장의 집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용모가 단정하고 성품이 온화하였으며 친구들과 장난치며 노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장성하여서는 독서에 매진하였는데 1555년(명종 10) 15세의 나이로 청량산(淸凉山)에 들어가 책을 읽었다. 3년 뒤 가을부터는 성재(惺齋) 금난수(琴蘭秀)에게 고문(古文)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1559년 금난수의 소개로 평생의 스승인 퇴계(退溪) 이황(李滉)을 만나게 되었다. 이황 문하에서 수학하면서 이황의 장손 이안도(李安道)와도 교유하였다. 스승 이황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10여 년 동안 문하를 떠나지 않고 늘 함께 생활하였다. 평소 수업이 끝난 뒤에도 홀로 단정히 앉아 독서를 하며 학문에 온 마음을 쏟았기에 이황 역시 이덕홍을 친자식처럼 여기며 아꼈다.

또한 직접 ‘간재(艮齋)’라는 호를 지어 주었으며 임종에 이르러서는 자신의 서책을 맡아서 정리해 달라는 당부를 하기도 하는 등 사제지간의 정이 각별하였다. 때문에 이덕홍이황의 언행이나 행동을 기록한 『계산기선록(溪山記善錄)』, 이황과의 질의 내용을 모아 정리한 『주역질의(周易質疑)』, 『사서질의(四書質疑)』 등을 남길 수 있었다.

1578년(선조 11) 조정에서 훌륭한 선비 9명을 천거하라는 명이 내려졌을 때 정구(鄭逑)·남치리(南致利)·성호(成浩)·김장생(金長生)·구사민(具思閔)·권응시(權應時)·김윤신(金潤身)·문몽원(文夢轅)과 더불어 4위에 뽑혀 조정에 나아가 집현전참봉을 시작으로 종묘서직장, 세자익위사를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세자인 광해군을 성천까지 호위하였으며 「구선도(龜船圖)」와 함께 바다에서는 거북선을, 육지에서는 거북거[龜車]를 사용할 것을 진언하기도 하였다.

1593년 노모를 봉양할 수 있도록 부탁하여 영춘현감(永春縣監: 영춘현은 현 충청북도 단양군 영춘면·가곡면·어상천면 일대에 있던 옛 고을)에 제수되었다. 당시는 전쟁의 화는 잠시 멈추었으나 계속되는 기근에 백성들의 삶이 매우 곤궁한 상태였는데 이덕홍은 백성들과 함께 소나무 껍질과 도토리를 먹으면서 구휼에 온 마음을 다하여 관내에 굶어죽는 자가 없게 되었다고 한다. 1594년 겨울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오계(迂溪)의 북쪽으로 돌아와 장사지내고 무덤 곁에서 여막살이를 하였다. 어머니를 잃은 깊은 슬픔에 쇠약해져 2년 뒤인 1596년 향년 56세의 나이로 여막에서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사상]

이덕홍은 스승 퇴계 이황의 학문을 이어받아 사서(四書), 『심경(心經)』, 고문(古文), 『주자가례(朱子家禮)』 등 여러 방면에 통달하였는데, 특히 『주역(周易)』에 조예가 깊었다. 이황이 궁리(窮理)와 격물(格物)의 오묘함을 시험하고자 이덕홍에게 혼천의(渾天儀)인 선기옥형(璇璣玉衡)을 만들라고 명하였는데, 옛 제도와 꼭 같이 만들어 이황이 더욱 권장하였다고 한다. 당시 제작한 선기옥형은 현재 도산서원(陶山書院)에 보관되어 있다. 이황뿐만 아니라 권우(權宇), 남치리 등 당대의 명유들과도 교분을 맺고 학문에 대해 토론하였다.

[저술 및 작품]

문집으로 『간재집(艮齋集)』 원집 8권 4책과 속집 5권 3책이 있다. 기타 저술로는 『계산기선록(溪山記善錄)』, 『주자서절요강록(朱子書節要講錄)』, 『사서질의(四書質疑)』, 『심경질의(心經質疑)』, 『주역질의(周易質疑)』, 『고문전후집질의(古文前後集質疑)』, 『가례주해(家禮註解)』 등이 있다. 『간재집』은 1752년(영조 28) 현손 이장진(李長鎭) 등이 활자로 간행하였다. 그 뒤 1766년 목판으로 중간하였고 1829년(순조 29) 속집을 간행하였다.

[묘소]

묘소는 경상북도 안동시 녹전면 원천(元川)에 있다.

[상훈과 추모]

1615년(광해군 7) 임진왜란 때 광해군을 호종했던 공을 인정받아 원종1등공신이 추록되고 이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에 추증되었다. 1665년(현종 6) 영주 사림들이 오계정사(迂溪精舍)에 위판(位板)을 봉안하고 묘호를 ‘도존사(道存祠)’라고 하였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9.04.08 일부 오류 수정 증조부는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 -> 증조부는 이흠(李欽), 묘소 위치 : 영주시 평은면 천본리 오계(迂溪) -> 안동시 녹전면 원천(元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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