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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칠정논쟁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400400
한자 四端七情論爭
영어의미역 Dispute of Four Beginnings and Seven Feelings
이칭/별칭 사칠,사단칠정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정명수

[정의]

조선시대 안동 지역에서 이황기대승이 사단(四端)·칠정(七情)과 관련하여 8년 동안 논변한 일.

[개설]

사단칠정논쟁은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 1527~1572)이 사단칠정에 관하여 1559년부터 1566끼지 8년 동안 편지로 논변한 일을 말한다. 이를 ‘사칠’·‘사단칠정’이라고도 한다. 사단칠정 논변은 1559년 1월 5일에 퇴계고봉에게 보낸 편지에서부터 시작하였다. 여기에 대하여 고봉은 1559년 8월에 퇴계에게 이의를 제기하였고, 이후 고봉퇴계는 격렬하면서도 심오한 사단칠정 논변을 벌였다.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이란 사단과 칠정을 이기(理氣)로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를 논의하는 것으로, 사단(측은지심·수오지심·사양지심·시비지심)과 칠정(희(喜)·노(怒)·애(哀)·구(懼)·애(愛)·오(惡)·욕(慾))을 각각 ‘이발(理發)’, ‘기발(氣發)’이라 할 수 있는가 없는가, 할 수 있다면 어떤 이유에서이며, 할 수 없다면 그 이유 또한 무엇인가에 대해 밝히는 것이다.

[과정]

사단칠정논쟁은 추만(秋巒) 정지운(鄭之雲, 1509~1561)이 지은 「천명도(天命圖)」의, “사단은 이로부터 발하고 칠정은 기로부터 발한다(四端發於理 七政發於氣).”라는 한 구절로부터 시작된다. 정지운은 이 책을 저술한 뒤 근처에 살고 있던 이황에게 검토를 부탁했다. 이황은 이 구절을 발견하고서 이와 기의 역할이 수동적으로 서술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사단은 이가 발한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한 것이다(四端理之發 七政氣之發).”라고 고쳐주었다. 이렇게 고쳐진 구절의 의미에 대해 기대승이 이의를 제기하면서 일명 사칠변론이 시작되었다.

이후 1558년에 고봉 기대승이황이 수정한 구절에 대해 이견을 제시하였고, 1559년 퇴계기대승에게 정지운의 「천명도」의 ‘사단이지발, 칠정기지발’을 ‘사단지발순리고무불선(四端之發純理故無不善), 칠정지발겸기고유선악(七情之發兼氣故有善惡)’으로 개정하였다고 편지를 보낸다. 이에 대해 기대승은 답서를 보냄으로써 편지를 통한 논변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것은 이후 8년 동안 진행된다.

이렇게 논변의 발단은 인간의 정(情)인 사단·칠정을 이·기로 나누어 해석한 것이 핵심이다. 즉 인성론(人性論)의 내용인 사단칠정을 이기로 분속(分屬)하고 나아가 사단을 이발로, 칠정을 기발로 보는 이기론적인 독특한 해석을 가함으로써 시작된 것이다. 왕복 편지는 『고봉집(高峯集)』의 「사칠이기왕복서(四七理氣往復書)」에 수록되어 있다. 아울러 정지운의 「천명도설서」와 변록(辨錄), 후지(後識) 등이 함께 수록되어 있어서 그 자세한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

[평가]

사단칠정논쟁에 대해 현승종은 “당시의 학계에 청신한 공기를 주입시켜 우리의 주자학을 심성설 연구에 몰두케 함으로써 우리의 유학철학을 중국의 그것 이상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계기를 만들었고, 나아가서는 영남학파·기호학파 또는 주리파·주기파라는 유학계의 양대산맥을 이룩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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