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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401544
한자 金南洙
영어음역 Gim Namsu
이칭/별칭 중심,우전,학산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오천리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강윤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가
출신지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오천리 지도보기
성별
생년 1899년연표보기
몰년 1945년연표보기
본관 광산

[정의]

일제강점기 안동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중심(仲尋), 호는 우전(雨田)·학산(鶴山)이다. 1899년(고종 36)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오천리에서 탁청정(濯淸亭) 종손 김영도(金永燾)의 차남으로 출생하였다.

[활동사항]

김남수는 안동에서 류인식(柳寅植)·김동삼(金東三) 등이 세운 최초의 중등학교인 협동학교(協東學校)와 서울 중동학교에 다닌 적이 있다고 전해진다. 예안면 3·1운동에 참여한 그는 1920년부터 사회운동에 뛰어들었다. 1920년 가을 류인식의 지도로 조선노동공제회 안동지회가 조직되자, 여기에 참여하면서 그의 사회운동은 시작되었다. 안동청년회에 참가하고 동아일보 안동지국 총무로 활약하던 그는 상경하여 동향 출신인 김재봉(金在鳳)·권오설(權五卨)·이준태(李準泰) 등과 조선노농총동맹 등에서 활동하며 서울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1923년 6월 경성고무공장 여공 파업의 진상을 알리기 위해 「경성고무 여공(女工) 동맹파업의 전말(顚末)」이란 보도 문서를 작성하고 78개 노동단체에 발송하였다가 체포되어 벌금형을 받았다. 그리고 이 해에 조선노동연맹회 제2회 정기총회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했다. 1923년 11월에 그는 안동에서 풍산소작인회(豊山小作人會)를 조직하여 안동에 사회운동의 뿌리를 내렸다.

1924년 이후 안동 지방 사회운동의 핵심으로 자리 잡은 김남수는 1925년 1월에 청년운동단체들을 지도하고 여기에 사회주의 사상을 주입하기 위해 화성회(火星會)를 조직하는 데 앞장섰고, 상무집행위원을 맡아 주도 인물이 되었다. 그 해 4월에는 화요회가 계획한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를 준비하기 위해 경상남도 지방으로 파견되기도 하였다. 또 1925년 10월에는 안동노우회(安東勞友會) 창립총회의 사회를 맡았다. 1925년 11월에는 도산서원에서 소작료 납부 약속을 지키지 않는 소작인들을 구타하자 소작 투쟁 차원에서 도산서원 철폐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그해 11월에는 기자들의 모임인 안동기우단을, 다음해 12월에는 안동기자단을 결성하였다.

이후 제3차 조선공산당의 핵심 간부로 활동하던 김남수는 1928년 9월경에 체포되어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고, 폐병에다가 ‘정신이상설’이 신문에 보도되는 등 어려운 옥살이를 하였다. 또 1939년에는 사문서 위조 행사라는 이름 아래 다시 체포되어 징역 10월형을 선고받았다. 옥중 투쟁의 여독으로 1945년 광복을 맞이하기 직전에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2005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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