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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400466
한자 禮安面示威
영어의미역 Demonstration in Yean-myeon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강윤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항일만세운동
발생(시작)연도/일시 1919년 3월 17일연표보기
종결연도/일시 1919년 3월 22일연표보기
발생(시작)장소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 선성산|예안장터
관련인물/단체 신상면|조수인|이광호|이열호|신응한|이동봉|김동택

[정의]

1919년 경상북도 안동 지역의 예안면에서 일어난 3·1만세운동.

[역사적 배경]

1910년 8월 29일 우리 주권을 강제로 빼앗은 일본은 조선총독부를 설치하고, 일본 육군대장을 조선총독으로 임명하여 일본군 2개 사단과 헌병경찰제를 기초로 입법·행정·사법 및 군사의 전권을 행사하며, 식민지 지배 정책을 강행하였다.

[목적]

거족적인 민족 운동에 동참하여 일제의 강점을 거부하고 자주독립을 찾고자 일으킨 운동이다.

[발단]

예안면 시위는 1919년 3월 1일 고종의 장례식에 참가하였던 이동봉(李東鳳)·김동택(金東澤)·신응한(申應漢) 등이 서울의 만세시위를 직접 보고 돌아와 소식을 전하면서 준비되었다.

[경과]

1. 1차 예안면 시위

안동 지역에서 대규모 군중에 의해 최초로 만세시위가 일어난 곳은 예안이었으며, 두 차례에 걸친 시위운동이 전개되었다. 예안면 시위는 계획 단계에서 세 갈래로 나뉘어 준비되었다. 하나는 예안면장 신상면(申相冕)을 중심으로 면사무소 숙직실에서 논의되었고, 또 하나는 조수인(趙修仁)을 비롯한 예안 유림들에 의해 계획되었다. 세번째는 신응한(申應漢)을 중심으로 한 만촌교회 교인들에 의해 계획되었다.

예안면 시위는 3월 17일 오후 3시 30분 무렵, 면사무소 뒤편 선성산(宣城山)에 올라가 일제가 세운 어대전기념비(御大典記念碑)를 쓰러뜨리고, 독립만세를 부르는 것을 신호로 시작되었다. 이어 시장 주변에 자리하고 있던 세 개의 시위대가 일제히 시장을 향해 터져 나왔다. 1,500여 명으로 늘어난 시위대는 신상면·조수인·이광호(李洸鎬)·이열호(李列鎬)·신응한의 주도 아래 만세운동을 펼쳤다.

일제 경찰은 수비대까지 동원하여 진압에 나섰지만 이동봉은 만세를 부르며 시위대를 예안주재소로 이끌었다. 이를 본 이열호와 예안선명학교·예안보통학교 학생들이 태극기를 던지며 시위대의 사기를 돋우었다. 그러나 주동자를 비롯한 15명이 체포되면서 시위대는 해산되었다. 이것이 1차 예안면 시위이다.

2. 2차 예안면 시위

2차 예안면의 시위는 다음 장날인 3월 22일에 일어났다. 2차 시위는 2,000여 명의 군중들이 태극기를 들고 동부동서부동, 선성산에 올라가 무리를 지어 만세를 부르면서 시작되었다. 시위대는 장터에서 경찰 2명을 포위하였다. 그러자 경찰이 발포를 시작하였고, 시위에 참여하였던 사람들 가운데 13명이 부상을 입고 3명이 체포되었다.

[결과]

예안면 시위로 50여 명이 재판에 회부되어 실형을 선고 받았다.

[의의와 평가]

안동 지역에서 대규모 군중이 참여한 최초의 만세시위였으며, 식민통치기관인 면사무소에서 만세운동이 계획되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또한 예안면 시위는 이튿날인 3월 18일에 벌어진 안동면 시위를 고무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참고문헌]
이용자 의견
남** 외 할아버지
어머님도 지난해 돌어가쎴어요
만나 보셨는지요
http://blog.daum.net/skagnsrms/139
2016.0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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