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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401648
한자 申東熙
영어음역 Sin Donghui
이칭/별칭 순화(舜和),창산(滄山)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동부리
시대 근대/근대,현대/현대
집필자 한준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가
출신지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동부리 지도보기
성별
생년 1886년연표보기
몰년 1961년연표보기
본관 평산

[정의]

일제강점기 안동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순화(舜和), 호는 창산(滄山)이다. 1886년 현재의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동부리에서 태어났다. 동부리에 묘가 있다.

[활동사항]

신동희는 1911년 일본 수묵관(修黙館)을 졸업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1919년 고종 황제의 죽음으로 전국적으로 3·1만세시위가 펼쳐지자, 그는 이것을 기회로 나라를 되찾고자 하였다. 1919년 안동의 3·1만세시위는 3월 13일부터 3월 27일까지 안동·예안·임동·임하·길안 등 11개 지역에서 14회에서 걸쳐 일어났다. 이 가운데 신동희는 안동 지역에서 대규모 군중이 최초로 만세시위를 일으킨 3월 17일 예안면 1차 만세시위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예안면 1차 만세시위는 예안면장인 신상면(申相冕)이 3월 11일 밤 9시에 신동희를 비롯한 이시교(李時敎)·이중원(李中元)·이남호(李南鎬)·백남학(白南鶴)·이광호(李洸鎬) 등을 면사무소 숙직실로 불러 『독립신문』을 보여주면서, 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제의하면서 시작되었다.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뜻을 같이 하여 예안면 장날인 3월 17일을 거사일로 결정하고, 이곳에서 면사무소의 등사판을 이용하여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대량으로 인쇄·제작하였다.

드디어 3월 17일 오후 3시 30분경,이광호·이동봉(李東鳳) 등이 군중을 이끌고 면사무소 뒤편 선성산(宣城山)에 올라가 일제가 세운 ‘어대전기념비(御大典記念碑)’를 쓰러뜨렸고, 그와 동시에 1,500여 명의 시위 군중은 예안주재소로 몰려가 독립만세를 불렀다. 그리고 약 600명은 산을 타고 안동 시내로 들어가 3월 18일 안동면 2차 시위에 합세하였다.

이때 신동희는 저녁 7시 시위 군중과 함께 예안주재소로 몰려가 구금자의 석방을 요구하며 돌과 기와를 던져 주재소의 유리창을 깨고 안으로 들어가 만세를 불렀다. 이로 인하여 신동희는 1919년 5월 21일 대구지방재판소에서 징역 1년형을 언도 받았다.

[상훈과 추모]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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