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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해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401629
한자 朴鎭海
영어음역 Bak Jinhae
이칭/별칭 남포(南圃)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 주진리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한준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가
출신지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 주진리 지도보기
성별
생년 1894년연표보기
몰년 1951년연표보기
본관 밀양

[정의]

일제강점기 안동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박진해는 본관이 밀양(密陽)으로 1894년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 주진리에서 태어났다. 호는 남포(南圃)이다. 1951년 사망하였으며 묘소는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이하리에 있다.

[활동사항]

1919년 고종의 죽음으로 전국으로 3·1운동의 물결이 퍼져 나간 가운데 안동 지역에서는 3월 13일부터 3월 27일까지 안동·예안·임동·임하·길안 등 11개 지역에서 14회에서 걸쳐 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이중 박진해는 3월 17일 예안면 1차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

예안면 1차 만세 시위는 이광호(李洸鎬)·이동봉(李東鳳) 등이 군중을 이끌고 면사무소 뒤쪽 선성산(宣城山)에 올라가 일제가 세운 ‘어대전기념비(御大典記念碑)’를 쓰러뜨리면서 시작되었다. 이어 1,500여 명의 시위 군중은 예안면 주재소로 몰려가 독립 만세를 불렀으며, 약 600명은 산을 타고 안동 시내로 들어가 3월 18일 안동면 2차 시위에 합세하였다.

박진해는 오후 7시경 김창락(金昌洛) 등 시위 군중과 함께 주재소로 몰려가 구금자의 석방을 요구하고 주재소 안으로 들어가 돌과 기와를 던져 유리창을 깨고 만세를 외쳤다. 또 일제 경찰 세 명을 포로로 잡아 무장 해제시킨 뒤 대한 독립 만세를 부르게 하였다. 이 일로 박진해는 경찰에 체포되어 1919년 5월 3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선고 받고 공소를 제기하였으나, 5월 31일과 7월 12일 각각 대구복심법원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1983년 대통령 표창을 받았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이용자 의견
박** 안녕하세요 박진해 할아버지의 고손자입니다 박진해할아버지의 산소가바뀌어서 이렇게의견에글을쓰게되었는데요
박진해할아버지의 산소주소가바뀌어이렇게써봅니다 현제 저의고조할아버지께서는 안동시 예안면 주진리 산 66-2번지 남향기슭에자리잡고계십니다
  • 답변
  • 디지털안동문화대전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전 내용의 수정을 위해서 민원인분의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와 근거 자료를 첨부하시어 elikusa@aks.ac.kr로 송부해주시기 바랍니다. 확인 후 수정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의견 개진에 감사드립니다.
2019.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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