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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형평사 안동분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400484
한자 朝鮮衡平社安東分社
영어음역 Joseonhyeongpyeongsa Andongbunsa
영어의미역 Andong Social Equality Society
이칭/별칭 안동형평분사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강윤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사회운동단체|신분해방운동단체
설립연도/일시 1923년 10월연표보기
해체연도/일시 1937년 5월 1일연표보기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북도 안동 지역에 있었던 조선형평사 소속 분회.

[설립목적]

조선형평사는 백정의 신분해방운동의 일환으로 1923년 4월 경상남도 진주에서 시작되었고, 경상북도에서도 대구에 형평사지사(6월), 경주분사(7월), 상주 수평동맹회(8월), 예천분사(8월), 고령분사(9월) 등이 결성되었다.

[변천]

안동 지역에서는 1923년 10월 안동분사가 결성되어 형평운동을 전개하였다. 출발 시기에 안동분사원은 80여 명에 달했고, 안동의 사회운동단체들이 안동의 형평운동을 지원했던 것으로 보인다.

[활동사항]

안동 지역의 형평사 활동은 ‘예천사건’을 계기로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예천사건은 형평사 예천분사 창립 2주년 기념행사가 열린 1925년 8월 9일부터 시작되었다. 기념행사가 끝난 뒤 그날 밤부터 이튿날 밤까지 예천노농회와 예천면민 수백 명이 형평사 예천분사 사무실을 습격하였다. 이들은 집기를 부수고 사원들을 구타하여 많은 중상자를 발생시켰고, 급기야 사망자가 나오게 되었다.

형평사 예천분사 창립 2주년 기념행사에는 안동의 김남수를 비롯하여 서울 총본부에서 파견된 장지필과 이소가 참여하였다. 사건이 터지자 장지필과 이소는 위협을 느껴 예천경찰서에 신변보호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예천경찰서가 이들의 요구를 무시하는 바람에 군중의 공격을 받아 큰 부상을 당했고, 안동으로 후송되어 간신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당시 조선일보 안동지국장이었던 김남수는 조선일보를 통해 이 사건을 전국에 알렸다. 이로 인해 예천사건은 상당히 세밀하게 보도되었고, 전국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안동 형평분사도 8월 15일 긴급회의를 열고 예천사건을 논의하였다. 8월 21일 1시에 안동형평 제2지사는 임시총회를 열었다. 바로 2시간 뒤인 오후 3시에 안동청년회관에서 안동의 12개 사회운동단체 대표가 모여 대책을 협의하고, 조사위원을 파견하여 그 결과를 전국 각지로 알려 원조를 구하기도 했다.

1926년 9월에는 서울 중앙총본부에서 임시대회를 개최하여 경제적 조건을 필요로 하는 인권해방, 일반사회단체와 손잡고 합리적 사회건설, 형평운동의 원활화, 백정계급의 당면한 실제적 이익을 위한 투쟁 등을 강령으로 채택했다. 별동 기관으로 각지에 형평청년회를 조직하고, 아동교육을 목적으로 하는 형평학우동맹·형평여성단체를 운영하는 한편, 기관지 『세광(世光)』을 발행하는 등 활발하게 형평운동을 전개했다.

조직이 확대되고 운동이 진행됨에 따라 1929년 4월 제7회 대회에서 박평산(朴平山)·이동환(李東煥)·서광훈(徐光勳) 등 형평청년전위동맹 중심의 신파(新派)는 사회운동단체와의 협동전선론을 주장한 반면, 장지필·김종택(金鍾澤)·길순오(吉淳吾) 등의 구파(舊派)는 전통적 수준의 운동을 주장하여 양 노선의 갈등이 깊어졌다. 1930년 말부터 사회단체들의 해소 주장과 이듬해 봄 신간회의 해체에 영향을 받아 신파에서 해소론이 제기되었다.

1931년 4월 경성에서 제9회 대회가 열려 신파의 해소건의안은 부결되고 10월의 임시대회에서 집행위원장 장지필, 서기장 김종택이 선출되어 구파가 표면적으로 승리했다. 이후에도 신파가 해소론을 주장하는 가운데 활동이 침체되었고 일제의 압력으로 1937년 5월 1일 해체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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