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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안면 시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400446
한자 吉安面示威
영어의미역 Demonstration in Gilan-myeon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길안면 천지리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강윤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항일운동|독립운동|만세운동
발생(시작)연도/일시 1919년 3월 21일연표보기
종결연도/일시 1919년 3월 21일연표보기
발생(시작)장소 경상북도 안동시 길안면 천지리 천지장터지도보기
관련인물/단체 김필락|손두원|손영학|김정익|김정연|김술병|정성흠

[정의]

1919년 안동 지역의 길안면에서 일어난 3·1만세운동.

[역사적 배경]

1910년 8월 29일 우리 주권을 강제로 빼앗은 일본은 조선총독부를 설치하고, 일본육군대장을 조선총독으로 임명하여 일본군 2개 사단과 헌병경찰제를 기초로 입법·행정·사법 및 군사의 전권을 행사하며, 식민지 지배 정책을 강행하였다.

[목적]

길안면 시위는 거족적인 민족 운동에 동참하여 일제의 강점을 거부하고 자주독립을 찾고자 일으킨 운동이다.

[발단]

길안면 시위는 1919년 3월 21일 장날을 이용하여 임하면 오대동의 손영학(孫永學)·김정익(金正翼)·김정연(金正演) 등의 주도로 펼쳐졌다. 여기에 서울에서 고종 인산에 참가한 정성흠(鄭成欽)도 끼어 있었다.

[경과]

시위대는 깃발을 앞세우고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장터를 돌다가 면장과 면서기들의 참여를 촉구하기 위해 면사무소로 향하였다. 이에 맞서 일본 경찰이 시위대를 막고 나서자 350여 명의 시위대는 면사무소에 돌을 던져 유리창과 출입문을 부수었다. 이어 시위대는 300여m 떨어진 길안면 주재소로 향하였다. 시위대가 주재소 유리창을 부수기 시작하자 경찰들은 공포를 쏘기 시작하였고, 시위대는 흩어졌다.

[결과]

길안면 시위가 일어난 다음날에 길안면 주재소에서 시위에 가담한 김술병(金述秉)·정성흠을 붙잡아 갔다. 3월 24일에는 손두원(孫斗源)이, 3월 26일에는 김필락(金珌洛)이 일본 경찰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 두 사람은 천지장터 시위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지만 경찰이 이들을 실제 주동자로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날의 시위로 인해 13명이 실형을 언도받고 곤욕을 치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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