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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학파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400410
한자 嶺南學派
영어음역 Yeongnam Hakpa
영어의미역 Yeongnam School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정진영

[정의]

조선시대 안동 지역을 중심으로 이황의 성리학설과 학통을 계승한 영남의 학파.

[형성 과정]

조선왕조의 통치 이념으로 채택된 성리학은 16세기 후반에 접어들자 사림 세력의 정계 장악과 함께 정치적으로는 동서 분당(東西分黨), 학문적으로는 영남학파(嶺南學派)와 기호학파(畿湖學派)로 분열되었다. 영남학파란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퇴계(退溪) 이황(李滉)·남명(南冥) 조식(曺植)에 의해 형성된 학통을 말한다.

영남학파는 15세기 후반 김종직(金宗直)을 영수로 한 영남사림파(嶺南士林派)와는 달리 이기심성론(理氣心性論)과 예학(禮學)을 바탕으로 한 사변적(思辯的)인 성리학을 더욱 중시하였다. 그리고 우계(牛溪) 성혼(成渾)율곡(栗谷) 이이(李珥)를 중심으로 한 기호학파에 대칭되면서 학문적으로는 주리론(主理論), 정치적으로는 동인의 입장을 고수하였다. 이황조식은 을사사화(乙巳士禍) 이후에 본격적으로 등장하여 동서 분당 이전에 일생을 마치면서 각기 경상좌도와 경상우도를 대표하여 영남학파의 양대 산맥인 퇴계학파와 남명학파를 형성하였다.

[분화와 발전]

영남학파는 1575년(선조 8) 동서 분당 때 퇴계남명의 문인이 함께 동인 편에 섰으나 뒤에 기축옥사(己丑獄死)를 계기로 동인이 다시 남인과 북인으로 분당되면서 퇴계 문인은 주로 남인, 남명 문인은 주로 북인 편에 서게 되면서부터 두 학파는 서로 학문적 입장과 정치적 성향을 달리하게 되었다. 이후 특히 양 사문(師門)의 수제자격인 안동 지역의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과 진주 지역의 내암(萊庵) 정인홍(鄭仁弘)이 서로 정적(政敵) 관계로 발전하게 되자 두 학파의 대립도 더욱 첨예해졌다.

정인홍의 북인 세력이 집권하는 선조 말에서 광해군 대까지는 남명학파가 다소 득세하였으나 정인홍의 지나친 행위 때문에 이탈자가 계속 늘어났고,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정인홍이 처형됨으로써 지리멸렬하게 되었다. 남명학파의 일부는 경상좌도의 퇴계학파로, 일부는 서인 편으로 전향하였다. 나머지 일부 세력은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에 가담함으로써 마침내 노론(老論) 정권의 철저한 보복을 받았다.

류성룡정인홍의 치열한 남북 대결에 경상좌도와 경상우도의 유림이 크게 분열되자 퇴계남명 두 사문을 출입했던 한강(寒岡) 정구(鄭逑)가 산음 출신의 동계(桐溪) 정온(鄭藴)과 함께 경상도의 유림을 화합하는 데 크게 힘을 기울였고, 퇴계남명의 학통을 계승한 정구장현광(張顯光)이 성주(星州)·인동(仁同) 등을 기반으로 성장하면서 17세기부터는 점차 경상좌도와 경상우도의 구분이 무의미해지게 되었다.

그 대신 영남 지방을 상도(上道)와 하도(下道)로 구분하는 관례가 생겨났다. 상도는 안동·상주에 성주까지 포함시킨 것으로 현재의 경상북도 지방과 대체로 일치한다. 하도는 진주와 경주 남서부를 포함한 현재의 경상남도 지방에 해당한다.

[영남학파와 안동]

영남학파는 퇴계학파와 남명학파로 존재하였지만, 인조반정 이후 남명학파가 점차 위축되거나 퇴계학파로 편향됨으로써 조선 후기에는 퇴계학파가 영남학파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이후 퇴계학파는 다양한 학맥으로 계승되어 갔지만, 중심지는 여전히 안동 지역이었다.

이러한 사정은 퇴계의 문인이 전국적인 범위로 분포하고 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안동 지역의 인물들이 가장 많다는 사실에서 먼저 확인할 수 있다. 즉 『도산급문제현록(陶山及門諸賢錄)』에 수록된 인물 가운데 미상을 제외한 210여 명 중 안동 지역 출신자가 115명으로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더욱이 퇴계 이후 퇴계학파를 계승한 것은 학봉 김성일(金誠一)서애 류성룡이었고, 학봉의 학통은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으로 이어지면서 안동 지역을 중심으로 크게 발전해 갔다는 점 또한 그러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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