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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마을은 진법치기가 특이해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4E020103
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가송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조정현

대개의 서낭당들이 매년 정월 대보름날 한 차례씩 제사를 올리는 데 비해 가송리에서는 정월 대보름과 단오에 마을굿을 한다.

그런데 정월 대보름 마을굿 때는 산성에 세배를 다녀오고 신내림을 받지만 단오 때에는 산성에 가는 일이 없고 신내림도 받지 않으며 간단히 지낸다.

가송 사람들은 아주 옛날에는 매년, 다음에 2년 터울, 그리고 30여 년 전까지만 해도 3년마다 한 번씩 정월 초이튿날과 초사흘에 입칠봉을 넘어서 산성마을 공민왕당으로 세배를 갔다.

초록저고리와 다홍치마의 서낭대를 모시고, 마을 사람들이 왕복 30리 길의 세배를 다녀왔던 것이다. 이렇게 세배를 다녀와서 당주(堂主)를 정하였다. 예전에는 이 때 신의 계시를 받아 신대가 멈춘 집 주인이 당주가 되었다고 하지만 근래에는 산성으로 세배를 가지 않으며, 신내림도 받지 않고 마을 사람끼리 모여서 그 해의 당주를 선출한다.

동제를 지낼 때 당으로 가는 길에는 길굿을 치면서 가는데, 도중에 행하는 가송리만의 독특한 연행 양식으로 ‘단수치기’라는 것이 있다. 이는 언어를 형상화한 풍물가락을 통해 굿의 목적을 예술적으로 수행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단수치기의 형태는 당으로 길굿을 치며 가다가 이전에 당이 있었던 자리 근처에 도착하면 모두가 일렬로 그 쪽을 보고 멈추어 서서 “성황당 성황당 성황성황 성황당” 하면서 구음의 가락을 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구음을 형상화한 가락을 3회 치면서 인사를 드리고 다시 길을 가는 형태로 세 군데에서 단수치기를 한다. 이는 ‘나는 오늘 제사를 받든다’는 뜻이라고 한다. 비슷한 예로 소산동 마을굿에서도 구체적인 가락은 없지만 12골 마다에 제자리에 서서 인사를 드리는 양식이 전승되고 있어 안동 지역의 독특한 연행 형식으로 주목할 만하다.

일행이 당에 도착하면 당주와 몇몇 사람은 제물을 차린다. 동시에 또 몇몇 사람은 아래 공터에 횃불을 피우는데, 이때 풍물패는 당 앞에서 원을 그리며 풍물을 계속 울린다. 진설이 끝나면 ‘부정치기’를 한다. 부정치기는 솔잎뭉치로 바가지에 담겨진 물을 사방에 뿌리고 바가지를 엎어 칼로 친 다음 칼을 옆에다 두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이때 읊는 사설은 다음과 같다.

“오늘이 14일이올시다. 다 이 터전 이 명당에 다 서낭님 대주 문전에 다 동방청제 부정신아, 남방적제 부정신아, 서방백제 부정신아, 중앙황제 부정신아 다 그 이름 다 이 터전 이 명당에 각각 다 지금대로 다 좌정점지하옵소서…….”

사설이 끝난 후에는 밥에 수저를 꽂아둔다. 간단히 부정치기가 끝나면 당주와 제관들이 잔을 올린다. 이때는 유교식의 초헌, 아헌, 종헌의 형식을 갖추어 진행한다. 이후 잠시 쉬었다가 풍물을 치면서 원진을 돌고, 어깨춤을 추기 시작한다.

이때 신대잡이가 신대를 들고 원의 중앙에 위치한다. 이렇게 흥을 돋우다가 ‘진법치기’가 시작된다. 신대잡이와 함께 제관들이 당을 등지고 일렬로 서서 풍물장단에 맞추어 아랫마당으로 내려가면, 풍물잽이들은 제관들과 마주하여 일렬로 서서 아랫마당으로 뒷걸음쳐 내려간다. 아랫마당에 내려오면 신대잡이가 가운데 서고 함께 원진을 이룬다. 그리고 다시 종전과 같은 방식으로 일렬로 마주보고 이번에는 제관들과 신대잡이가 뒷걸음쳐서 당으로 올라온다.

이렇게 ‘미지기’ 방식으로 반복되어 이루어지는 연행을 진법치기라고 한다. 위와 같은 방식으로 보통 아홉 번을 반복한다고 해서 삼삼(3*3)진법이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이것은 고정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신의 뜻에 따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옛날에는 이틀에 걸쳐 계속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진법치기가 계속되면서 절정에 이르게 되면 신대가 심하게 흔들리면서 당 쪽으로 기운다. 그러면 제관들과 풍물패들은 우르르 따라 올라가고 당주는 신대에 걸려 있는 치마와 저고리를 벗겨서 당 안의 벽에 걸어둔다. 그러면 신대에는 꿩깃털과 속옷이 남게 되는데, 이후에 다시 한 번 진법치기를 하고 다시 신대가 당 쪽으로 기울면 속옷을 풀어서 당 안에 걸고 제관들이 재배한다.

가송동 마을굿에서 중시되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신대이다. 이 신대에 여성의 옷을 걸고 마을굿이 진행되며, 이 신대에 내린 신을 다시 당에 모시는 방식인 것이다. 또한 신탁에 의지해서 굿을 진행해 나간다. 즉 신대가 당에 붙어야 확실히 신이 편안하게 좌정했다고 믿는 것이다.

가송동의 진법치기는 본래 12채에 맞추어 구성된 화려한 진법놀이였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두 가지의 진법만이 남아 있으며, 놀이적인 요소나 군사진법적인 요소는 거의 사라진 상태이다. 이러한 군사적인 용어인 진법치기가 가송리 마을굿을 상징적으로 표현해 주는 단어가 된 것은 공민왕의 몽진과 산성의 영향으로 보인다.

서낭당이 있는 계곡 서편 쪽의 입칠봉 너머로 가면 산성이 있다.

이 산성은 내성과 외성으로 구분되어 청량산 깊은 쪽으로는 외성의 자취가 남아 있고, 내성 쪽에 산성마을이 형성되어 있어 왕의 임시 도성이 되었음직한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오마도(五馬道)라 해서 공민왕이 타고 온 다섯 말이 끄는 마차가 지나갈 수 있는 길이 있어 이를 반증해 준다고 주민들은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가송리에서 진법치기라는 12채의 진풀이가 전승되었다는 사실은 이곳을 중심으로 왕을 호위하기 위한 군사훈련이 거행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해 주며, 그것을 기념하여 진법치기란 형태로 마을굿에 편입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현재 12채의 가락은 제의의 맥락에서 거의 쓰이지 않고 있다. 본래는 당고사를 지내고 나서 음복을 하면서 뒷전 같은 식으로 놀 때 일정한 규식을 가지고 12채의 가락과 진법을 벌였다고 하는데, 현재는 그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가락만 남아 있는 것이다.

따라서 본래는 마을굿의 마지막 절정으로 판굿의 형식이 12채 진법을 중심으로 발달했던 것으로 판단되며, 그것이 퇴화되면서 지금에 이른 것이라 볼 수 있다. 이것은 또한 예전에 있었다는 잡색을 통해서도 확인되는데, 사대부·각시·포수·탈광대(일명 바가지탈) 등이 연행에 참가했다는 사실은 지금의 형태보다 더 발달된 양식의 판굿이 성행했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다.

[정보제공]

  • •  이일영(남, 1935년생, 가송리 거주)
  • •  금용극(남, 1939년생, 가송리 거주)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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