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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402323
한자 別神-
영어의미역 Village Tutelary Festival
이칭/별칭 큰굿,대제
분야 생활·민속/민속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조정현

[정의]

경상북도 안동 지역에서 무당이 마을 수호신에게 드리는 제사.

[개설]

별신굿은 촌락 공동체에서 매년 지내는 동제와는 달리 특별하게 몇 년 터울로 벌어지는 별제(別祭)이다. 이를 ‘큰굿’·‘대제’ 등이라고도 한다. 마을 공동으로 마을의 수호신을 제사하는 점에서 동제(洞祭)와 유사하나, 동제는 동민 중에서 뽑은 제관이 제사를 주관하는 데 비하여 별신제는 무당이 주재하는 점이 다르다.

굿을 행하는 주체에 따라 개인굿·마을굿·고을굿·나라굿 등으로 구분했을 때 별신굿은 대개 마을굿에 속하는 것이다. 주로 고을 단위로 행해졌지만 때로는 몇 개의 마을들이 모여서 보다 성대한 별신굿을 벌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별신굿은 한 마디로 ‘풀이’이며 ‘막음’이라 할 수 있는데, 마을의 역사와 내력을 풀어내어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인하면서 언제 다가올지 모를 액을 막아내는 주술적이며 동시에 사회적인 집단 행위인 것이다.

초기에는 주술종교적 풀이와 막음의 제의였지만 점차로 사회적·정치적 풀이와 막음의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이러한 과정 속에서 극적 발전을 이루어냈다. 모듬살이를 영위해온 마을 공동체들의 신앙이 구체적으로 표현되는 시공간이 바로 제의(祭儀)라고 한다면, 별신굿은 이러한 제의의 연행이 역사적·사회경제적·연행예술적으로 총체화되고 종합되는 공동체 제의의 장(場)이라고 할 수 있다.

[지역적 특성]

모든 제의가 사회적 성격에 따라 그 특성이 달리 표현되듯이 별신굿도 지역적 특성에 따라 달리 표현되어진다. 안동 지역의 별신굿은 경상북도 북부 지역에 위치한 이 지역의 지리적·사회적 특성과 함께 다른 지역과 구분된다. 안동 지역에서 별신굿을 행했던 곳으로 현재 알려져 있는 마을은 풍천면 하회리병산리, 풍산읍 수리, 임동면 마령리, 도산면 가송리 등이다.

안동 지역에서 별신굿이 강성했던 데에는 안동이 가지고 있는 유교사회적 전통이 적지 않게 작용했음을 알 수 있다. 별신굿에는 양반들과의 첨예한 대립 속에서 신앙과 대동(大同)으로 팽팽하게 맞섰던 안동 지역 기층민들의 힘이 담겨 있으며, 여기에는 양반 세력들과의 보이지 않는 긴장과 역동성이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안동 지역에서는 특히 양반과 농민간의 조정통로로 별신굿이 기능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것은 소극적 의미에서의 숨구멍 내지 통풍장치로 설명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님을 명백히 해야 할 것이다. 서로의 팽팽한 긴장관계 속에서 균형을 이루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안동 지역에서는 전면적인 농민전쟁 등이 일어나지 않았으며, 양반 역시 농민들을 홀대하거나 크게 억압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산주의 역할]

하회별신굿 같은 경우에는 별신굿을 담당하는 ‘산주’라는 직책이 있어 정기적인 별신굿 이외에도 현몽 등의 신탁을 받아 언제라도 별신굿을 벌여낼 수 있었다. 마을 전체의 운명이 걸린 동신의 신탁을 양반들도 거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별신굿 때 이외에는 절대 풍물을 울릴 수 없었을 정도로 엄격함과 축제성이 양 극단을 이루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양 극단의 한 중앙에 바로 별신굿이 놓여 있는 것이다. 풍산류씨 세력과 각성받이들이 팽팽한 긴장관계를 유지하면서 서로 타협하고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나름대로의 질서가 세워진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특히 탈놀이와 풍물, 진법놀이, 각종 굿놀이가 연행되는 별신굿에서는 반상의 구별도 없고 남녀노소, 놀이꾼과 구경꾼 사이에 구별이 없어진다. 뿐만 아니라 일상과는 반대로 상민이 양반을 호령하기도 하고, 양반이 힘없이 굴복하기도 한다. 이러한 일상의 탈피 속에서 모든 사람이 가락과 놀이 자체에 몰입하게 된다. 따라서 하회 류씨의 영향권 아래에 있었던 병산이나 수동 역시 신의 권능을 빌어 양반 세력과 팽팽한 긴장관계를 유지했을 것이며, 그 기제로 사용되었던 것이 바로 별신굿이었다.

더욱 주목되는 것은 수동별신굿이 5개의 자연마을들이 모여서 벌인 민중의 해방적 축제였다는 점이다. 한 마을의 힘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기에 여러 마을들이 힘을 모아 자신들의 질서가 구현된 시공간을 연출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조율 속에서 안동 지역은 나름대로 조화로운 질서가 자리 잡혔고, 큰 변란 없이 전통문화의 고장으로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 질서 속에는 바로 별신굿도 한 몫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별신굿을 통한 양반의 농민에 대한 인정, 그리고 민중 스스로 느끼는 마을의 주인으로서의 자신들을 경험하는 시공간이 바로 별신굿이었기 때문이다.

[절차]

별신굿은 정월 대보름 기간에 주로 연행된다. 정월은 묵은해가 가고 새해로 넘어가는 과도기이다. 이러한 과도기의 첫날인 설날에는 가정에서 차례를 지내고 정월 셋째 날 즈음에 제관과 유사를 뽑는다. 이때 제관과 유사는 생기복덕이 맞는 사람을 뽑는다고 한다. 왜냐하면 깨끗한 사람이 제관을 하지 않으면 동신이 화를 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집안에 상이 났거나 또는 출산을 했거나 주부가 월경 기간인 집에서는 제관을 맡지 못한다. 동회를 통해 깨끗한 제관을 뽑고 나면 본격적인 굿 준비로 들어간다. 먼저 마을 입구와 당(당집 또는 당나무, 당바위 등), 그리고 제관집에 금줄을 치고 황토를 뿌려 신성한 공간임을 표시하고 함부로 드나들지 못하도록 한다.

그리고 나서 풍물을 잡고 지신밟기로 집집마다 다니며 복을 빌어주고 액을 물리면서 별신굿에 필요한 경비도 마련한다. 이렇게 별신굿의 분위기를 고조시키다가 정월 열이틀 날이나 사흘 날에 제수를 장만하러 인근 장에 가는데, 이때에는 말을 해서도 안 되고 흥정을 해서도 안 된다고 한다.

제관은 길면 일주일 또는 사흘 정도 금기를 지키며 별신굿을 준비한다. 보통 음력 정월 14일 밤 자정을 기해서 별신굿을 행하는데, 이날은 풍물을 치면서 저녁나절부터 별신굿의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마을신이 거처하는 당은 한 곳에만 있지 않고 보통 두세 군데에 존재한다. 따라서 별신굿은 이들 당으로 이동하며 풍물로 질굿(길굿)을 친다. 당에 도착하면 제물을 진설하고 서낭대(깃발)를 당에 모신다.

당에서는 먼저 신성한 공간을 깨끗이 하기 위하여 부정치기(물 또는 불로 부정을 몰아냄)를 하고, 초를 키거나 술을 올려 신을 부르며(곳에 따라서는 축을 읽고), 모신 신을 즐겁게 하기 위하여 더욱 흥겹게 풍물을 울리거나 탈놀이·진법희 등을 벌이고, 마지막에는 마을의 소원을 비는 각종 소지를 올린 후 신을 보낸다. 이렇게 별신굿을 끝내고 나면 제물을 나누어 음복하고 다음날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동회를 열고 대동놀이를 벌인다.

[안동 별신굿의 특징]

이러한 별신굿의 모습은 전국 어디에서나 유사한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안동의 별신굿은 다른 지역과 다른 몇 가지의 특징을 지닌다. 첫째, 안동의 별신굿에서 섬겨지는 마을신은 공민왕계 가족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즉 풍산읍 수리에서 섬기는 신격이 공민왕 부부이고, 하회의 국사당 그리고 가사리에서 모셔지는 마을신이 공민왕의 딸신이라고 하며, 이웃 마을의 마을신을 공민왕의 사위라고 하는 것이 그 예이다. 또한 부인, 아들 등도 등장하여 범지역적으로 한 가족을 이루고 있는 셈이다.

둘째, 진법희(수리), 진법치기(가송리) 등과 같은 독특한 형식의 굿 형태가 남아 있다. 셋째, 탈놀이와 허제비놀이가 발달했다는 점이다. 하회와 병산별신굿의 탈놀이, 수동별신굿의 호장탈, 마령별신굿의 호랑이굿과 허제비놀이 등이 그것이다.

[공민왕과의 연관성]

결국 안동 지역 별신굿의 특징과 기원은 공민왕과 관련되어 집중되고 있음이 두드러진다. 또한 이것의 구체적인 형상화에 있어서 탈놀이와 진법희로 표현되고 있음도 주목된다. 학자들 간에 이견이 있기는 하지만 안동 하회마을의 중당이 국사당으로 표현되고 있는 사실로 미루어 공민왕을 신격으로 모시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며, 수동별신굿 같은 경우에는 확실히 공민왕과 관련된 별신굿 유래를 보여준다.

또한 병산 역시 도령당이라 하여 별신굿을 모시는데, 이 역시 병산서원공민왕이 하사한 사전에 의해 유지되었음을 살펴볼 때 공민왕을 신격으로 삼았을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도산면 가송리에서는 공민왕의 딸을 신격으로 모심으로써 공민왕 가계에 대한 신앙이 성행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사실들로 미루어 볼 때 안동 지역에서는 공민왕에 대한 기념적 축제로서 별신굿이 성행해 왔으며, 이에 대한 구체적인 표현으로는 탈놀이와 진법희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러한 별신굿들은 지역민들에게 자긍심과 정체성의 기재로 작용해 왔고, 이 힘들이 안동 지역에서 별신굿이 최근세까지 전승될 수 있게 만든 동인이 되었음도 확인된다.

결국 안동 지역에 별신굿이 성행한 까닭은 공민왕과 관련한 역사적 사건에 대한 기념적 축제 전승과 함께 지역적 정체성을 드높이기 위한 재지사족 양반 세력들의 의도와, 이를 적극적으로 끌어안아 자신들의 해방구를 열어내면서 언론권과 힘의 결집을 이루고자 했던 일반 민초들의 팽팽한 긴장관계가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역동적인 상호교섭이 있었기에 별신굿은 더욱 발전하였고 점차 민중들의 축제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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