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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401600
한자 金祉燮
영어음역 Gim Jiseop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강윤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가
출신지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 지도보기
성별
생년 1884년연표보기
몰년 1928년연표보기
본관 풍산

[정의]

일제강점기 안동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김지섭은 본관이 풍산(豐山)으로 1884년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에서 김병규(金秉奎)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자는 위경(衛卿), 호는 추강(秋岡)이다. 1928년 사망하였으며 묘소는 대전광역시 유성구 갑동 산23-1번지 국립대전현충원의 애국지사 묘역에 있다.

[활동사항]

족숙인 운재(雲齋) 김병황(金秉璜)에게 한학을 배웠고, 1905년 상주보통학교(尙州普通學校) 교원에 이어 금산지방법원(錦山地方法院) 서기 겸 통역관으로 재직하였다. 1908년 설립된 교남교육회(嶠南敎育會)에 참여하여 교육 구국 운동을 전개하였고, 1920년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였다.

1922년 여름 무렵 의열단에 가입하여 7월부터 서울에 들어와 독립운동 자금 모집 활동을 벌였다. 1923년 3월에는 김시현(金始顯)·류석현(柳錫鉉) 등과 함께 일제 통치 기관을 파괴할 목적으로 폭탄 36개를 상하이에서 국내로 들여왔다. 한국 독립운동 사상 국내로 가장 많은 무기를 들여왔던 이 거사는 그러나 폭탄을 미처 사용하지도 못한 채 계획이 노출되어 실패로 돌아갔다. 김시현을 비롯한 단원 13명이 검거되었는데 이때 김지섭은 탈출에 성공하여 다시 상하이로 갔다.

1923년 9월 도쿄에 대지진이 일어나고 1만여 명의 한국인이 죽음을 당하는 ‘한국인 대학살’이 일어나자 의열단이 일본에서 거사할 것을 결의함에 따라 1923년 12월 20일 밤 의열단 기밀부가 준 대추 모양의 폭탄 세 개를 외투 속에 숨기고 일본행 화물선에 올랐다.

처음 목표인 제국의회가 휴회 중이자 거사 장소를 일본 왕궁으로 바꾸어, 1924년 1월 6일 오후 7시 20분쯤 양복 주머니에 폭탄 세 개를 감추고 왕궁으로 들어가는 이중교(二重橋) 근처에 이르러 폭탄을 던졌다. 한 개는 불심 검문을 하는 순사를 향해 먼저 던졌고, 나머지 두 개는 이중교를 경계하고 있던 근위 보병을 향해 던졌으나 모두 터지지 않았다. 첫 번째 폭탄은 습기가 차서 도화선이 타들어 가지 않았고, 나머지 두 개는 양손에 하나씩 들고 있다가 미처 안전핀을 뽑지 못했다.

김지섭은 그 자리에서 체포된 뒤 “무죄 방면 아니면 사형을 선고하라”는 법정 투쟁을 벌이면서 “나는 결심과 각오가 있어서 한 일이니 지금 와서 아무 할 말이 없다”며 변호사도 거부하였다. 결국 재판에서 무기 징역을 선고 받고 복역 중 1928년 2월 20일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이중교 의거’로 불리는 이 거사는 일본 왕을 처단 대상으로 삼은 첫 번째 투쟁이자 식민지 해방 투쟁사에서 빛나는 의열 투쟁이었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 『추강일고(秋岡逸稿)』가 있다.

[상훈과 추모]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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