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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군 인민위원회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400487
한자 安東郡人民委員會
영어의미역 Andong-gun People's Committee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강윤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자치기구
설립연도/일시 1945년 9월연표보기

[정의]

광복 직후 안동 지역에 조직된 민중 자치 기구.

[설립목적]

안동군 인민위원회는 과도적 비상시국에 혼란을 막고, 민중들의 생존권을 확보하면서 공백 상태에 있는 행정을 장악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변천]

1945년 8월 말 전국 145개의 치안유지회가 결성됨과 더불어 안동 지역에서도 인사들을 중심으로 안동읍사무소에서 군민대회를 열고 15인의 전형위원을 뽑고 안동군 치안유지회를 조직하였다. 치안유지회 위원장은 석주 이상룡의 손자인 이대용, 고문에는 김광현이 추대되었다. 1945년 9월 8일 안동에 미군이 진주하였으며, 안동군 치안유지회는 안동군 인민위원회로 명칭과 조직을 변경하였다. 이 과정에서 우익 세력은 분리되었고, 좌익 세력이 중심이 된 안동군 인민위원회는 면(面)인민위원회, 민주청년동맹농민조합 등을 조직하였다.

안동의 많은 유림 출신들은 인민위원회에 앞장섰다. 여기에는 일제강점기 민족해방투쟁을 전개했던 인사들 중 좌익 계열이 많았다는 배경이 작용하고 있었다. 이에 대응하여 우익 계열은 안동혁신대·우국노인회, 조선독립촉진회 안동군위원회 등을 조직하였다. 한편 안동군 인민위원회는 1946년 3월부터 수개월동안 공적(公的)인 일에 간섭하였다는 이유로 미군과 경찰에 의해 간부들이 구금되는 등 본격적인 탄압을 받기 시작하였으며 이후 조직이 약화되었다.

[활동사항]

인민위원회의 활동은 대체로 조직·선전·치안·식량·재정을 담당하는 부서를 두고 지역에 따라 보건후생·귀환동포·소비문제·노동문제·소작료문제 등을 다루는 부서를 조직했다. 강령은 대체로 비슷한데 첫째, 모든 일본의 재산은 한국인에게 돌려준다. 둘째, 모든 토지와 공장은 노동자, 농민에게 속한다. 셋째, 모든 남녀는 평등한 권리를 갖는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다. 안동군의 경우도 이러한 연장선에서 활동을 전개하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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