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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401725
한자 李相龍
영어음역 Yi Sangryong
이칭/별칭 만초(萬初),석주(石洲),이상희(李象羲),이계원(李啓元·李啓源)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법흥동
시대 조선/조선 후기,근대/근대
집필자 강윤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가
출신지 경상북도 안동시 법흥동 지도보기
성별
생년 1858년연표보기
몰년 1932년연표보기
본관 고성
대표경력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정의]

일제강점기 안동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본관은 고성(固城). 자는 만초(萬初)이며, 호는 석주(石洲)이다. 초명은 이상희(李象羲)이나, 1911년 만주 망명 이후 이상룡(李相龍)으로 개명하였으며 계원(啓元·啓源)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1858년 지금의 안동시 법흥동 임청각에서 이승목(李承穆)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학문적으로는 퇴계 학통을 계승한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의 제자인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과 종고모부인 척암(拓庵) 김도화(金道和), 친족인 평담(平潭) 이전(李銓)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특히 19세에 서산 김흥락의 문하에 들어가 그의 학문을 계승하며 안동 지방의 거유(巨儒)로 성장하였다. 서간도로 망명한 1911~1918년에는 이곳으로 이주해 온 우리 민족의 경제적 안정을 도모하면서 독립운동가를 양성하는 데 주력하였고, 1930년 초까지 중국 각지에 흩어진 독립운동 세력의 통합과 결속을 위해 노력하였다.

[활동사항]

이상룡은 1900년대 초반까지 주로 스승·동문들과 성리철학 문제에 대해 깊이 토론하며, 강회 개최, 향음주례 시행, 향약 제정과 시행 등 성리학적 질서를 향촌에 뿌리내리는 데 주력하였다. 그러다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면서 본격적으로 의병 활동에 나섰다.

1905년 겨울 영해 출신인 매제 박경종(朴慶鍾)과 함께 1만 5000냥을 모아 가야산에서 거병한 은표(隱豹) 차성충(車晟忠)을 지원하는 한편, 신돌석(申乭石)·김상태(金相台) 등과도 연대를 모색하였다. 그러나 차성충의 기병이 실패로 끝나자 의병 항쟁이 가지는 한계를 깊이 인식하고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한 끝에 계몽운동을 시작하였다. 이에 이상룡은 1909년 4월 계몽운동 단체인 대한협회 안동지회를 결성하였다.

1910년 8월 대한제국이 일본에 강제 병합되자, 1911년 1월 5일 가솔과 가까운 친척을 이끌고 서간도로 망명하였다. 망명 직후인 1911년 4월 유하현(柳河縣) 삼원포에서 경학사(耕學社)를 설립하고 사장으로 취임하였다. 또한 서간도 각지에 흩어져 있던 청년들을 모아 경학사 부속 기관으로 설치된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통해 청년들을 훈련시켰다.

1919년에는 만주 한인 사회의 자치기구인 한족회(韓族會)를 조직하였다. 한족회는 경학사(1911~1913), 공리회(1913~1916), 부민단(1916~1919)의 정신을 계승하여 결성된 만주 한인 사회의 민정기관이었다. 여기에서 이상룡은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활약하였다. 1919년 4월 군정기관으로 조직된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서 최고 대표인 독판에 선임되었다. 이상룡서로군정서의 독판으로 일제에 계속 항쟁하면서 국내에 조직된 의용단(義勇團)과 연결을 꾀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였다.

또한 1921년 북경군사통일회의에 참석하였고, 이어 남북만주와 연해주에 각기 일어나고 있던 독립군단과 항일 단체들의 통합을 시도하여 1922년 6월 서로군정서와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을 비롯한 8단 9회의 단체를 통합하여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를 성립시켰다. 1925년 9월 이상룡은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에 추대되었다. 국무령에 취임하여 당시 만주와 중국 대륙에서 독립군을 이끌며 항일 투쟁에서 큰 성과를 올리고 있던 인물들을 중심으로 조각(組閣)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독립운동 세력을 조정·통합하려는 노력이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1926년 봄 국무령 직책을 사임하였다. 1926년 2월 다시 만주로 돌아온 뒤 정의부(正義府)·신민부(新民府)·참의부(參議府)를 비롯한 만주 지역 광복 단체의 통합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만주 침략으로 만주에서의 항일 운동이 매우 어려운 국면을 맞았던 1932년 5월 길림성 서란현(舒蘭縣)에서 74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는 『석주유고(石洲遺稿)』가 전한다.

[상훈과 추모]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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