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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400441
한자 六十萬歲運動
영어음역 Yuksip Manse Undong
영어의미역 June 10 Independence Demonstration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강윤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항일운동|독립운동|만세운동
발생(시작)연도/일시 1926년 6월 10일연표보기
종결연도/일시 1926년
발생(시작)장소 서울 종로3가(단성사 앞)
관련인물/단체 권오설|이선호|류면희|권오상|권오운|권태성|이수원

[정의]

1926년 6월 안동 출신 권오설이 주축이 되어 일으킨 만세 운동.

[개설]

6·10만세운동은 1926년 6월 10일 순종 장례일을 기해 일어난 만세운동으로 3·1만세운동을 계승한 제2의 만세운동이다. 이 운동을 계획한 사람은 안동 출신의 권오설이며, 안동 출신의 학생 이선호·권태성·류면희·권오상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목적]

3·1만세운동과 같은 거족적인 만세운동을 통해 민족의 독립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발단]

6·10만세운동은 4월 말경부터 계획되기 시작했으며, 그 중심인물이 안동 출신의 권오설이다. 권오설은 1926년 5월 1일 상주(喪主) 차림으로 변장하고 압록강을 넘어 중국 안동현(安東縣, 현 중국 단둥)에서 김단야를 만나 활동 방향을 논의하였다. 제2의 만세운동을 펼치는 것이 그 핵심이었다.

권오설은 국내로 돌아와 조선공산당의 찬동을 얻어냈다. 그러나 제1차 조선공산당이 무너지고, 아직 제2차 조선공산당 조직이 튼튼하지 못한 상황에서 섣불리 일을 벌이다가는 자칫 당이 붕괴될 수 있었기 때문에 고려공산청년회 차원에서 일을 맡기로 했다. 이에 권오설의 책임 아래 6·10투쟁특별위원회가 만들어졌다.

[경과]

권오설은 3·1운동 때와 같이 전 민족적인 운동으로 발전시키고자 사회주의·민족주의·종교계·청년계·학생계를 망라한 통일전선 조직을 구상하였다. 그 결과 국외에서는 조선공산당 임시상해부와 상해의 임시정부 및 그 외곽단체인 병인의용대, 국내에서는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천도교·조선노농총동맹, 그리고 일본 유학생과 국내 조선학생과학연구회 ‘통동계’가 주역으로 참가하였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안동 출신의 학생 이선호·권태성·류면희·권오상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는 점이다.

그런데 만세시위가 일어나기 직전 그 준비 과정이 노출되면서 6월 7일 권오설이 체포됨에 따라 시위 계획이 무산될 위기에 부딪혔다. 그러나 6월 10일, 장례 행렬이 종로3가 단성사 앞을 지나자, 당시 중앙고보생이었던 안동 출신의 이선호가 길 가운데로 뛰어나오며 만세를 부르기 시작했고, 이것이 6·10만세운동의 신호탄이 되었다. 이선호의 뒤를 이어 중앙고보생들이 만세를 외치고 태극기와 격문을 뿌렸고, 만세운동은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관수교(觀水橋)·경성사범학교 앞·훈련원·동대문·청량리에 이르는 연도에서도 많은 민중이 호응하였다. 이 사건으로 이날 200여 명이 붙잡혔고, 그 영향은 전국적으로 파급되어 순창·정주·군산·울산·평양·홍성·공주 등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안동 지역에는 6월 10일 만세운동이 전개되지는 못했지만, 전국적으로 확산되던 망곡(望哭: 임금이나 부모상에 가지 못하고 그 곳을 향해 슬피 우는 것)과 동맹휴학운동이 전개되었다. 4월 29일 일반 시민 400~500명과 여자 300~400명이 구 연병장에 모여 곡을 하였다. 사립보통학교는 휴교하였고, 보통학교 여자부 5·6학년들은 검은 댕기를 달고 조의를 나타냈다. 4월 30일 학교 당국이 학생들의 움직임을 막아보려고 조회를 열었지만, 안동보통학교 5·6년생도 250여 명이 참여를 거부하고 동맹휴학에 들어갔다.

[결과]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조선공산당 176명이 체포되었다. 이것이 이른바 1·2차 조선공산당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화요파가 주도한 최초의 조선공산당이 붕괴되었다. 안동 출신의 권오설·이선호·류면희·권오상도 체포되었다. 이 날의 만세시위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지는 못했지만, 각 학교의 동맹휴학은 전국적으로 퍼져 나갔다. 이는 3·1운동 이후 꾸준히 쌓아온 학생들의 결사·동맹휴학·계몽활동 등의 학생운동이 다져져서 이루어진 결과였으니, 6·10만세운동은 3·1운동과 1929년 광주학생운동을 잇는 교량 역할을 담당하였다.

[의의와 평가]

6·10만세운동은 3·1운동의 경험을 바탕으로 일어났지만 운동의 주체와 이념적 측면에서 뚜렷한 차별성을 보이며, 민족통일전선을 이룩하였다. 천도교와 조선공산당·학생층 등 다양한 주체들이 서로 정치적 이념을 초월하여 통일전선을 형성하였고, 이는 신간회운동과 민족유일당운동의 기초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안동 출신의 권오설·이선호·류면희·권오상·권오운·권태성·이수원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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