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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400386
한자 高麗時代
영어의미역 Goryeo Period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시대 고려/고려
집필자 김호동

[정의]

918년에서 1392년까지 고려 왕조가 지속되었던 시기의 안동 지역의 역사와 문화.

[개설]

고려시대 안동은 안동도독부, 안동도호부, 복주 등의 이름으로 불리면서 수령이 파견되던 주읍으로서 최고 14개의 속읍을 거느린 경상북도 북부 지방의 중심이었다.

[변천]

통일신라시대의 안동은 고창군(古昌郡)으로 직녕현(直寧縣), 일계현(日谿縣), 고구현(高丘縣)의 3읍을 영현으로 거느렸다. 백두대간의 준령이 거대한 자연 장벽을 형성하고 있는 고립된 영남 북부 지역의 내륙 분지인 안동은 문화적 후진 지역에 속하였지만 험준한 지리적 조건으로 말미암아 일찍이 호족이 성장할 수 있었다. 고려 태조 왕건과 후백제 견훤 사이의 후삼국 쟁패전은 927년(태조 10) 공산 전투 이후 주도권이 후백제로 넘어가 고려는 겨우 죽령로만을 확보하고 있을 뿐이었다.

930년(태조 13) 안동과 주변 지역에서 벌어진 죽령로 확보를 둘러싼 고창 전투에서 안동의 호족인 김선평·권행·장길이 왕건 측에서 활약하여 전투를 승리로 이끌자 왕건은 고창군에 안동부(安東府)를 설치하였다. 고창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강릉 지역에서 울산 지역에 이르기까지 110여 개 성이 고려에 귀부하는 등 후삼국의 주도권이 고려로 넘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후삼국 통일로 인하여 안동 지역이 갖고 있는 군사적 중요성이 떨어져 안동부를 곧 영가군(永嘉郡)으로 강등하였고, 995년(성종 14) 영가군을 길주(吉州)로 고치고 자사(刺史)를 파견하였다. 1012년(현종 3) 안무사(安撫史)를 두었다가 1018년 지길주사(知吉州使)로 고쳤고, 1030년(현종 21) 다시 안동부로 고치었다.

1197년(명종 27) 김사미(『영가지(永嘉誌)』에는 김삼효심(孝心) 등의 농민 항쟁 세력이 청도의 운문산을 거점으로 경상도 지역을 휩쓸 때, 이를 평정하는 데 공이 있다 하여 안동도호부로 승격하였다. 또한 1204년(신종 7) 동경(東京)·야별초(野別抄)·패좌(悖佐)등이 일으킨 신라 부흥 운동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안동대도호부로 승격하였다. 신라 부흥 운동을 진압한 최충헌 정권이 당시 경상도의 명칭을 경상주도(慶尙州道)에서 상진안동도(尙晋安東道)로 바꾼 것은 안동이 신라 부흥 운동을 진압하는 데 큰 공을 세웠기 때문이다.

1308년(충렬왕 34) 원나라 간섭기의 관제 개혁에 따라 복주목(福州牧)으로 고쳐 목사(牧使)를 두었고, 1361년(공민왕 10) 홍건적의 난을 피해 공민왕이 안동으로 왔을 당시 고을 사람들이 정성껏 받들어 다시 안동대도호부로 승격하였다. 공민왕이 안동으로 피난을 온 것은 안동이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으로 둘러싸인 내륙 분지이며 해안 지방과 멀리 떨어져 있어 왜구가 출몰하지 않는 안전한 곳이었고, 또 공민왕을 수행한 인물 가운데 안동과 관련이 있는 자들이 많았으며, 그로 인해 물적·경제적 지원도 다른 지방에 비해 유리했기 때문이다.

[주읍-속읍 체제의 군현제에서 안동부의 권역]

고려 군현제는 태조 23년과 성종 대를 거쳐 현종 연간에 들어와 제도적으로 완성되었다. 고려의 군현제는 소수의 주부군현(州府郡縣), 즉 주읍에 다수의 속읍과 향소부곡(鄕所部曲)을 영속시키는 주읍-속읍제를 근간으로 한 권역별 군현제로 편제되었다. 주읍 단위의 권역별 군현제는 신라처럼 전국의 개별 군현을 직접 지배하는 방식과 달리 주읍에만 수령을 파견하여 직접 지배하고, 속읍 및 향소부곡·처·장 등은 주읍을 통한 간접적인 지배 방식을 채택하였다.

상주목 관할 54읍 가운데 수령이 파견된 지역은 상주목, 경산부(지금의 성주), 안동 등 3읍에 지나지 않았다. 상주는 신라 이래 큰 읍이었고, 경산부는 후삼국 쟁패전 때 호족인 이총언이, 안동은 김선평·권행·장길의 삼태사가 태조 왕건을 도와 후삼국 통일에 큰 역할을 한 지역이었다.

수령이 파견된 주읍으로서의 위상을 가진 안동은 임하군(臨河郡)·예안군(禮安郡)·의흥군(義興郡) 등 3개 속군과 일직현(一直縣)·은풍현(殷豊縣)·감천현(甘泉縣)·봉화현(奉化縣)·안덕현(安德縣)·풍산현(豊山縣)·기주현(基州縣)·흥주현(興州縣)·순안현(順安縣)·의성현(義城縣)·기양현(基陽縣) 등 11개 속현을 거느린 대읍이었다. 안동의 속읍은 1143년(인종 21) 11개, 1172년(명종 2) 8개로 축소되었지만 주읍인 안동과 관할 속읍 지역은 단일한 정치적·경제적 단위체로서 또는 공동생활의 장으로서 사회적·문화적 공감대를 갖고 있었다.

[재지 세력의 동향]

안동 지역은 후삼국시대에 호족 세력이 강한 데다 특히 김선평·권행·장길 등 삼태사가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고창 전투를 승리로 이끌자 왕건은 고창성주 김선평을 대광, 권행과 장길을 대상에 각각 제수하고, 삼태사의 본관인 고창군을 안동부로 승격시켰다. 그러나 삼태사가 상경 종사하지 않고 재지 토착하면서 삼한공신이란 칭호와 안동의 고급 향직을 받아 본관을 지배하는 데 만족했기 때문에 삼태사의 후예인 안동김씨안동권씨의 중앙 진출은 고려 중기에야 이루어졌다.

즉 원나라 간섭기 안동 출신의 김방경이 두각을 나타내면서 안동 지역 출신들의 중앙 진출이 두드러졌고, 특히 공민왕이 홍건적의 침입 때 안동으로 피난을 왔던 인연으로 안동 지역 출신들이 중앙 진출의 호기를 잡게 되었다.

[문화]

통일신라시대 화엄종 확산의 전진 기지였던 안동은 신라 말 고려 초 과도기에 미륵 신앙이 크게 성행하기도 하였다. 후삼국의 주도권을 둘러싼 고창 전투에서 삼태사의 도움으로 고려가 승리를 하였지만 전쟁의 참화는 참혹하였다. 이 같은 격변기에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 미륵 신앙이었고, 그 신앙은 제비원 미륵불의 건립으로 표현되었다.

제비원 미륵불이 세워진 곳은 우리나라 성주 신앙의 본향으로 여겨진 곳이다. 성주풀이의 성주신은 오늘날 건축신의 성격을 갖고 있지만 당시에는 삼태사를 대표하는 성주 김선평을 가리켰다. 이후 점차 성주 김선평에서 고유명사 ‘김선평’은 빠지고 보통명사인 ‘성주’를 신격화하여 성주신으로 바뀌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제비원 미륵불 조성에 삼태사 등의 토착 정치 세력이 적극적으로 관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창 전투와 관련하여 전해지는 놀이 가운데 안동차전놀이가 있다. 견훤이 쳐들어왔을 때 삼태사가 짐수레와 같은 수레 여러 개를 만들어 타고 견훤의 군대를 격파한 데서 비롯한 놀이라고 한다. 차전놀이는 정월 대보름에 행하는 남성 집단 놀이로 동채싸움이라고 하는데 동채 결합을 통하여 풍년을 기원하는 의미가 있다.

홍건적을 피하여 안동으로 온 공민왕 일행이 다리가 없는 냇물을 건너게 되었을 때 부녀자들이 서로 등을 잇대어 왕비인 노국대장공주를 무사히 건너게 했다는 것을 기념하여 만든 안동놋다리밟기 같은 놀이는 고려 왕실과 안동 지역민이 맺은 관계를 상징한다. 최상층 지배층과 하층민이 직접 몸으로 부딪치며 정서적으로 교감하는 문화 소통의 절정을 이루는 놀이라 할 수 있다.

예능에 특별한 자질을 가졌던 공민왕은 안동 지역 문화에 많은 자극을 주었다. 우리나라 최고의 목조 건물로 알려진 봉정사 극락전을 비롯하여 여러 불교 건축물이 이때 보수되거나 재건되었다. ‘영호루’ 현판 및 ‘안동웅부(安東雄府)’란 현판도 공민왕의 글씨로 전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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