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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록강 건너 만주로 향한 김만수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4C030105
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미영

김만수(金萬秀)는 1893년 학호공파 김봉조의 10세손이자 김낙선(金洛璇)의 차남으로 오미리에서 태어났다.

이후 심곡공파 김낙운(金洛雲)의 양자로 들어간 김만수는, 양부(養父)로부터 한학을 배운 후 18세에 풍산에 위치한 역동의숙(嶧洞義塾)에서 2년 동안 공부를 하였다.

평소 나라 잃은 아픔을 절감하고 국권회복의 기회를 엿보던 김만수는 1915년 족친인 김응섭(金應燮)과 함께 일제와 맞서 싸울 것을 의논하고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향했다. 당시 만주에는 이상룡(李相龍)이 광복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길림성에 널찍한 터전을 마련하고 농사를 지으면서 ‘길남장(吉南莊)’이라는 도장을 설치하여 군사훈련장으로 이용하고 있었다. 김만수는 이곳에서 군사지식과 기술을 습득하며 김동삼, 김응섭, 양기탁, 윤기섭, 오광선 등과 함께 서로군정서(西露軍政署)를 조직하고 넓은 만주를 무대삼아 활약하였다. 김만수는 특히 하루에 3백 리를 갈 수 있을 만큼 걸음이 빨라서 주요 업무 추진과 연락 등을 담당하였다.

그러던 중 국내에서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김만수는 만주에 있는 독립지사들에게 만세운동에서 낭독되었던 독립선언문을 특유의 빠른 걸음으로 순식간에 배포해 주었다. 그 무렵 하얼빈 일대의 동포들이 일제의 탄압으로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다는 소식이 들리자, 김만수는 10여 명의 동지를 모아 건국청년모험단을 결성한 후 1923년 하얼빈의 구석진 곳에 셋방을 얻어 일제에 맞설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밀고로 인해 이들의 계획이 사전에 탄로나 일본 경찰의 습격을 받았다.

당시 방안에 있던 3명의 투사들은 경찰과 대치하여 맹렬히 총탄을 주고받았으나, 곧 김만수 일행의 실탄이 바닥났다. 얼마 후 일본 경찰이 안으로 들어왔을 때는 김만수 등 3명은 모두 가슴에서 피를 흘리면서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이들은 실탄이 떨어지자 마지막 대항으로 폭탄을 던진 다음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것이다. 그 후 김만수와 2명의 투사들은 중국의 공동묘지에 안장되어 있다가 시일이 지난 후 조선인민회의 도움으로 꿈에도 그리던 조선땅을 밟게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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