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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교육의 요람지 오릉학술강습소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4C020302
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미영

1917년 무렵 오미리에도 근대교육의 물결이 밀려들었는데, 그 출발은 오릉학술강습소이다. 오릉학술강습소는 김헌섭(金憲燮)의 발기로 창설되었으며, 초대교장은 김병택(金秉澤)이었다.

설립 당시에는 지금의 죽암서실에 교사를 마련하였다가 이후 도림강당으로 옮겼으며, 그런 다음 현재의 화수당(오릉학술강습소)으로 이건하였다.

오릉학술강습소에서는 보통과정(지금의 초등과정)을 가르쳤던 것으로 추측되는데, 주로 마을 내의 풍산김씨 일문이 주축이 되어 교육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간혹 문중직(文重稙)이나 조재건(趙在建)과 같이 타성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오미리에서 근대식 학교를 설립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김응섭김지섭, 김병필 등의 노력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들 모두 1908년 3월 15일 재경영남인사들이 창립한 교남교육회(嶠南敎育會)에 참여하여 교육구국운동을 전개하였던 인물이다. 특히 김응섭과 김병필은 교남교육의 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는데, 이는 오미리에 근대교육의 단초를 마련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오릉학술강습소의 학생 구성원에 대한 기록은 전하지 않으나, 아마도 설립 초기에는 주로 마을의 풍산김씨 자제들이 주축을 이루다가 점차 인근 지역까지 확산된 것으로 추측된다. 특히 1926년 당시 1학년부터 4학년까지의 학생이 70명이나 되었다는 사실로 미루어 오릉학술강습소가 근대식 교육의 메카로서 인근 지역을 아우르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오릉학술강습소의 재정적 기반은 1920년 마을의 계조직이었던 ‘의장소(義庄所)’가 기증한 재원이었다. 의장소는 1830년대에 결성된 계로서, 당초에는 10여 가구로 출발했으나 점차 가입 가구가 증가함에 따라 기반이 확고한 조직으로 거듭났다. 오릉학술강습소는 1925년에 74두락(약 46,280.99㎡)을 팔아 풍북사립보통학교를 설립했는데, 이로 볼 때 당시 의장소가 기부한 재원이 상당량에 달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오릉학술강습소는 전통 한학교육과 신식교육을 겸하고 있었다. 교실 구조는 전통 서당식의 형식을 취하고 있었으나 책상과 걸상을 구비하고 칠판까지 걸어 백묵을 이용하여 교육했으며, 소형 오르간을 비치하는 등 신식교육에 걸 맞는 각종 시설을 마련해 두고 있었다. 아울러 오르간을 이용하여 당시 유행하던 창가(唱歌)를 배우는가 하면, 새끼줄로 네트를 치고 판자로 공채를 만들어 정구시합을 즐기기도 하였다. 이렇듯 1919년 설립된 오릉학술강습소는 6년에 걸쳐 신식교육을 담당하며 오미리의 지성을 양육하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1920년대로 접어들면서 조선총독부에서는 사립학교규칙을 제정하여 전국의 사립학교를 통제할 목적으로 보통학교 신설을 추진하는데, 이 과정에서 사립학교를 공립학교로 편입시키는 대대적인 교육 개편작업을 착수하였다. 오미리의 풍북사립보통학교는 이런 이유로 1925년에 설립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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