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학봉 김성일을 감동케 한 김영조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4C010203
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미영

김영조(金榮祖)는 1577년 한양 장의동에서 부친 김대현과 모친 전주이씨 사이에 차남으로 태어나, 6세 되던 해에 부친을 따라 영주로 내려와 그곳에서 성장하였다.

이듬해인 7세부터 이웃에 살고 있는 장씨(張氏)라는 사람에게서 글을 배웠는데, 여타 학동들에 비해 총명함이 두드러져 “훗날 문호를 일으킬 사람이다.”라는 칭찬을 듣곤 하였다.

김영조가 8세 되던 어느 해,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이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가 김대현을 만나기 위해 잠시 영주에 들른 적이 있었다. 그런데 곁에 앉아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김영조가 “선생님께서 이번 길에 왜인들을 감동시키셨다는데 저희들이 본받음이 될까 하여 그 내용을 알고자 합니다.” 하고 공손히 청하였다. 이에 김성일은 어린 김영조의 진지한 호기심에 감동을 받아 일본 방문길에 작성한 기행문인 『해사록(海槎錄)』 3권을 건네주었고, 김영조는 그 자리에서 단숨에 읽고는 자리를 벗어났다고 한다. 그리고 이것이 인연이 되어 훗날 김영조김성일의 사위가 되었다.

1601년 25세 되던 해에 김영조는 사마시에 합격을 하고, 36세인 1612년에는 문과급제를 하였다. 그리하여 승문원정자로 임명되어 첫 벼슬길에 올랐으며, 40세에는 암행어사의 신분으로 관서 지방 일대를 살피고 다녔다. 이후 김영조는 모두 6차례에 걸쳐 민심을 살피는 암행어사의 책무를 수행했는데, 그 배경에는 공사(公私)를 엄격히 구분하는 강단(剛斷)이 있었기 때문이다. 형님인 김봉조가 영남 지역을 대표하는 올곧은 인물이었듯이, 김영조 역시 불의 앞에서는 소신을 굽히지 않는 품성을 지니고 있었다.

암행어사에서 돌아온 무렵 영창대군인목대비를 둘러싸고 조정이 날로 어지러워지자, 김영조는 모든 것을 벗어던지고 고향 오미리로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 세상과 담을 쌓은 채 10년이라는 세월을 보냈다. 1623년 광해군이 물러나고 인조가 즉위하자, 김영조는 예조좌랑에 임명되었고, 이후 여러 벼슬에 오르며 많은 업적들을 남기기도 하였다.

57세 되던 해인 1633년 김영조는 세자책봉주청부사의 신분으로 명나라로 떠나게 된다. 사실 외국 사신으로 가기에는 나이가 많았지만 김영조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왕명을 받들어 길을 나섰다. 하지만 그를 떠나보내는 주변 사람들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는데, 김상헌이 당시 김영조와의 이별을 아쉬워하면서 지은 「조천송별시(朝天送別詩)」을 감상해 보자.

변방에서 3년 동안 이별이더니

또다시 먼 길 떠나는구나

조정에 뛰어난 선비 많건만

나라 위해 혼자서 애를 쓰네

머리칼은 서리처럼 희어지는데

세상 떠난 친구가 반이 넘는다

오직 세도를 위해 슬픈 것이지

이 이별을 애석하게 여김은 아니리오.

그야말로 서리를 맞은 듯한 반백의 머리, 친구의 절반이 이미 세상을 떠난 나이에 접어든 김영조가 아니더라도 젊디젊은 신하들이 있음에도 바다 건너 먼 길을 떠나는 친구가 안쓰럽기 그지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나라를 위한 결단이었기 때문에 더없는 존경스러움이 시편에 고스란히 묻어 나온다.

명나라로 건너간 김영조는 임무를 완수하고 귀국길에 올랐으나, 큰 풍랑을 만나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로부터 약 석 달이 지나자 조정을 비롯하여 고향 오미리에서는 풍랑으로 인해 목숨을 잃었을 것이라고 판단하고는 대책을 마련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놀랍게도 며칠이 지나 배가 도착하고, 김영조는 한양에 발을 들여놓았다. 이때 김영조의 무사함을 전해들은 수많은 지인(知人)들이 환영을 나왔는데, 이 가운에 경상도 출신 선비 35명이 별도의 모임을 갖고, 이번 일을 계기로 ‘친목과 정치진로를 함께 하자’라는 뜻에서 ‘동도회(同道會)’라는 일종의 계를 조직하게 된다. 결성 당시 여효증(呂孝曾)이 작성한 「서동도회첩후(書同道會帖後)」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옛날 월(越)나라에서는 귀양 간 사람이 나라를 떠난 후 고국사람을 만나면 기뻐하고, 또 몇 달 만에 만나도 기뻐했다 하니, 우리 영남사람이 고향을 떠나 한양에서 벼슬을 하면서 같은 도내(道內) 사람을 보고 기뻐하며 하는 것은 인정(人情)이 같은 것이니, 기뻐하고 기뻐하는 일을 기록 않음이 옳을 것인가? 이것이 바로 동도회를 강론한 기원이며 동도회첩이 이루어진 뜻이로다. 비록 한두 사람이 같은 모임을 가짐도 또한 천리 밖의 좋은 일이거늘 하물며 우리 동도한 자가 35인이나 된다. 동도회를 조직할 때에 내가 도내의 여러 어른과 여러 친구의 뒤를 따른 것이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고, 금년 봄에 서울에서 회첩을 얻어 보니 경상도 각 읍에 있는 사람의 이름이 완전히 한 회첩에 실렸으니, 지난해에 모여서 술잔을 들며 이야기한 그 때를 기록하여 이것이 없어지지 아니하고 장차 집집마다 전하여 자손만대 보배로 삼도록 하자.

한편, 이렇게 결성된 ‘동도회’는 도중에 중단되었다가 1972년 다시 재건되었다. 현재 가입회원은 약 2백 명에 이르며, 매년 1회 정기모임을 갖고 있다.

이후 김영조는 대사헌과 예조참판, 병조참판 등의 벼슬을 두루 거치고는, 1648년 고향 오미리에서 향년 72세로 숨을 거두었다. 이후 김영조는 향내 유림들에 의해 불천위로 추대되어 봉화 오록리에 위치한 망와종택 사당에 모셔져 있다. 아울러 추원사에 부친을 비롯하여 형제들과 함께 봉향되어 있으며, 영주 구강서원(龜江書院)에도 배향되어 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