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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들의 놀이 - 지애밟기(놋다리밟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4B020302
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임하면 금소리
시대 조선/조선,근대/근대
집필자 한양명

금소의 놋다리싸움은 각기 다른 여러 가지 놀이들로 이루어진다. 이들 놀이 중 대표적인 것이 보름 명절의 특정한 밤이라는 시간적 한정성과 텃논과 구무다리라는 공간적 한정성을 지닌 채 행해지는 ‘꼬깨싸움’과 이어서 벌어지는 ‘구무다리뺏기’이다.

이들 놀이는 남성들의 놀이인 동채싸움을 벌인 이튿날 밤에 행해지며, 나머지 지애밟기와 콩심기, 제배달기 등의 놀이는 명절 기간 아무 때나 행해진다.

놋다리싸움은 정월 대보름 밤에 각 마을 여성들이 따로 모여 둘이 짝을 이뤄 어깨를 걸고 동네를 크게 한 바퀴 돌면서 “어-허-ㄹ-루-야, 놋다-래-야-”를 합창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이때 동선은 봇도랑 옆으로 난 길에서 마을 앞의 도로로 이어지는 타원형의 길이다.

이 길을 따라 동부 여성들은 서부 쪽으로, 서부 여성들은 동부 쪽으로 돌면서, 양편이 서로 만나게 되면 길을 비키지 않으려고 옥신각신하며 더러는 서로 길을 뺏으려고 밀어붙여서 격렬한 몸싸움이 전개되기도 했다.

김분애 할머니가 젊었을 적 하던 놋다리싸움을 기억해냈다. “예전에는 싱벽(승벽)이 있어 가지고 막 그때 도랑을 기준으로 싸움을 하고 그때 빠지고 그러는 사람이 있었지. 웃마의 만포네 어마이, 동구네 할마이, 동원이네 할마이가 그래 잘 놀았어.”

놋다리싸움을 하는 당일에는 놋다리밟기가 행해졌는데, 이때는 전날과는 달리 처녀나 새댁들만 참여하고 나이든 여성들은 놀이꾼들을 모으러 다녔다. 밤이 이슥하여 놋다리밟기가 끝날 때쯤 노소를 가리지 않고 마을 여성들이 텃논으로 모였다. 동채싸움과 마찬가지로 놋다리싸움의 참가자격도 일단 현재적 지연을 바탕으로 했으나, 아랫마을에서 시집온 경우 처음에는 윗마을 편을 들다가 싸움이 격해지면 아랫마을 편을 들거나 그 반대의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꼬깨싸움의 놀이꾼 편성은 동채싸움과 흡사했다고 전한다. ‘덩치가 크고 어구신’ 여자들이 앞머리꾼 역할을 하는데, 그들 중 특히 강한 여성이 ‘재빠르고 영근한’ 14~15세의 여자 아이를 어깨 위에 태운 꼬깨꾼이 된다. 꼬깨의 좌우와 후방에는 꼬깨를 보호하고 상대편을 공격하기 위한 인원이 겹겹이 배치된다.

꼬깨싸움의 형식도 동채싸움과 별반 바르지 않았다. 먼저 앞머리의 여성들이 강력하게 대치하여 ‘밀백이’(어깨로만 공격하는 것)를 오랜 시간 동안 계속한다. 서로 상대방의 약점을 발견하면 물밀듯이 밀어붙이는데, 이 과정에서 앞머리가 터지면 승부가 이내 결정된다. 꼬깨위에 탄 아이들이 서로 싸워서 한 쪽이 먼저 떨어지면 승부가 갈린다.

꼬깨싸움에서 1차로 승부가 결정되면 양편은 다시 전열을 가다듬어 구무다리로 돌진한다. 구무다리뺏기는 꼬깨싸움의 승리를 확인 받는 과정으로, 이 싸움에서 패하면 비록 꼬깨싸움에서 이겼어도 진정한 승리로 인정받지 못했다. 구무다리뺏기의 승부는 구무다리를 먼저 많이 건너간 쪽의 승리로 결정되었으므로, 양편의 여성들은 좁은 구무다리를 건너가기 위해 격렬한 몸싸움을 전개하였다.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봇도랑에 빠졌고, 다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고.

꼬깨 위에 탄 상대편 아이를 떨어뜨려 싸움에서 이긴 편은 ‘너른 마당이 있는 집’으로 가서 승리의 기쁨을 나눴으며, 이때 또다시 콩심기와 제배달기, 지애밟기 등의 놀이가 행해졌다고 한다. 한편, 남성들은 놋다리싸움에 참석할 수 없었으며, 동채싸움과 달리 구경하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단다.

[정보제공]

  • •  김분애(여, 1926년생, 금소리 거주)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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