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예전에는 죄 나락밖에 없었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4B010203
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임하면 금소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한양명

금소리의 경작지 대부분은 금소천(일명 길안천) 유역의 땅을 개간한 것으로, 보 등의 관개시설을 이용하여 벼농사에 적합한 논으로 변화시켰다.

1970년대 통일벼가 보급되기 이전까지 농촌사회의 가장 큰 고민거리는 끼니를 해결하는 일이었다. 농사가 평년작이라도 되는 해에는 그나마 덜했지만 흉년일 때에는 현재의 고리대금이라 할 수 있는 ‘장리(長利)’를 얻어야만 생계를 꾸릴 수 있었다.

금소 역시 이 같은 고민거리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지만, 일찍이 관개시설이 발달하고 논 위주의 경작지가 풍족했던 탓에 인근의 다른 마을보다 그나마 사정이 좋았다. 논이 부족한 일부 마을에서 밭벼까지 심었던 점을 고려하면 금소들을 비롯한 금소의 넓은 들판은 다른 마을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기에 충분했다.

이처럼 경작하는 토지가 넓고 관개시설이 발달하여 금소 주민들은 다른 마을에 비해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생활을 누렸다. 이런 경제적 풍요는 『영가지(永嘉誌)』에 기록된 것처럼 최소 17세기 이전부터 보장된 것으로 파악된다. 새마을운동기인 1978년 안동군에서 작성한 장부에는 군내 각 마을별 호당 평균소득이 기록되어 있는데, 임하면 내 20개 마을 가운데 금소가 250만 원으로 두 번째 높다. 이는 금소1리와 금소2리를 합해서 정리한 결과이다. 호당 평균소득 1위인 천전1리(289만 원)는 천전2리(190만 원)와 구별되어 있는데, 금소처럼 행정구역을 하나로 묶어서 그 소득을 셈하면 평균소득이 240만 원에 못 미친다. 통계의 근거나 정확성은 더 따져 봐야겠으나 같은 조건에서 이루어진 결과로 보고 소득을 계산하면 임하면 내 마을 가운데 금소의 소득이 가장 높게 나타난다.

이런 이유로 “금소동 부자는 임하면 부자”라는 말이 전하는가 하면 “쌀밥 좀 먹어 보려고 금소로 시집 왔다.”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또한 마을에는 이름난 천석꾼이 1~5명 정도 있었다고 한다. 그만큼 금소의 경제적 사정이 다른 마을에 비해 좋았다는 것이다. 한 할머니의 말에 따르면, 시집오기 전에는 명절이나 집안 제사를 제외하면 쌀밥을 좀처럼 구경할 수 없었는데 금소로 시집오면서 평소에도 쌀밥을 넉넉하게 먹을 수 있었다고 한다.

[정보제공]

  • •  조문순(여, 1925년생, 금소리 거주)
  • •  조영선(여, 1933년생, 금소리 거주)
  • •  임승대(남, 1946년생, 금소리 거주)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