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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암 이현일이 자랑한 금소마을 경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4B010102
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임하면 금소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한양명

금소의 역사에서 갈암(葛菴) 이현일(李玄逸, 1627~1704)의 위상은 남다르다. 이현일은 1701년 금소로 이주하면서 주민들과 각별한 인연을 맺게 된다.

퇴계 이황의 제자인 김성일(金誠一)의 학문은 장흥효(張興孝)를 거쳐 이휘일(李徽逸)이현일 형제에게 전해졌는데, 장흥효이휘일은 일생을 처사로 지냈으나, 이현일은 이조판서까지 올랐다. 또한 이현일은 360여 명에 달하는 문도를 배출하였으며, 그의 학문은 아들인 이재(李栽, 1657~1730)에게 이어졌다.

이현일이 살았던 시기는 정치적으로는 당쟁이 본격화되는 시기이고 사상적으로는 각 학파의 발전기에 속한다. 또한 사회적으로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양란을 겪으면서 전란의 폐허를 딛고 조선 사회 내부에 새로운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13세 되던 해 형 이휘일이 소망을 묻자 이현일은, “대장이 되어 오랑캐를 쓸어내고 요동을 수복하고 싶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전한다. 당시 북방을 장악하고 있던 세력인 청나라에 대한 저항 의식이 어린 이현일에게 장수의 꿈을 심어 주었던 것 같다.

이현일은 남인에 속한다. 동인 중에서 남인과 북인이 갈리는 것은 1589년(선조 22)의 일인데, 남인은 주로 이황 계열이, 북인은 주로 조식 계열이 속했다. 동인은 김효원을 중심으로 하는 사람들로 이황조식의 문인이 많이 속해 있었고, 서인은 심의겸을 중심으로 하는 사람들로 이이성혼의 문인들이 많이 속해 있었다. 1575년에서 1623년에 일어난 인조반정까지는 동인의 세력이 우세하여 정권을 담당했다.

남인이 정권을 담당했던 시기는 아주 짧았는데, 남북 분당 뒤부터 임진왜란이 끝날 때까지만 득세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남인은 실각하고, 오랫동안 정권의 상층으로 복귀하지 못한다. 이후 인조반정까지는 북인이 정권을 장악하였고 그 이후는 서인의 천하였다. 이현일이 살던 시대는 서인의 천하였으므로 남인 계열의 그가 출세를 하는 데는 많은 제약이 따랐을 것이다. 이현일이 과거를 보는 일에 열중하지 않았던 것은 이런 상황과 무관하지 않았을 터이다.

1694년(숙종 20)에 일어난 갑술옥사, 곧 갑술환국은 당시의 집권층인 남인이 폐비 민씨의 복위 운동을 꾀하던 일파를 제거하려다 도리어 화를 입은 사건으로, 정권 상층부에 있던 남인의 총체적 몰락을 가져온 사건이기도 하다. 이후 남인 정권은 다시는 회생하지 못하고, 정권은 서인 계열에 의하여 독점된다. 그리고 서인 계열은 노론과 소론으로 분화한다.

갑술옥사는 이현일의 몰락을 가져온 사건이기도 하였다. 갑술옥사를 맞았을 때 68세였던 이현일은 5년 전에 올린 상소의 표현이 문제가 되어 함경도 홍원으로 유배되었다.

귀양살이에서 풀려난 후에 이현일금소로 이주했고, 78세 되던 해인 1704년 10월 새로 지은 집에서 타계하였다.

이현일금소로 이주하면서 많은 문인들이 모여 수학했는데, 지금도 금소에는 이현일이 만년에 후학들을 가르치던 갈암금양강도지(葛菴錦陽講道址)가 남아 있다.

마을의 서쪽 끝부분에 위치하는 갈암금양강도지는 정면 5칸, 측면 5칸의 ㅁ자형 목조와가(木造瓦家)로, 1996년에 경상북도 기념물 제116호로 지정되었다.

한편 이현일의 후손이 현재 금소에 거주하는데, 이 같은 역사적 인연을 바탕으로 주민들과 돈독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임규영 옹이 말해 주었다. “재령이씨가 와서 그 우물정자 집에 살고 있거든. 우리 임씨하고 서로 인정이 좋지. 다른 성씨보다는 다르게 생각하지. 다른 성씨보다 가깝다고 생각해.”

[정보제공]

  • •  임규영(남, 1927년생, 금소리 거주)
  • •  남대원(남, 1931년생, 금소리 거주)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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