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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401392
한자 柳㮨
영어음역 Ryu Jik
이칭/별칭 정견(庭堅),백졸암(百拙庵),유직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정명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유생
출신지 경상북도 안동시
성별
생년 1602년연표보기
몰년 1662년연표보기
본관 전주

[정의]

조선 후기 안동 출신의 유생.

[가계]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정견(庭堅), 호는 백졸암(百拙庵). 할아버지는 류복기(柳復起)이며, 아버지는 류우잠(柳友潛)이다. 5남 1녀 가운데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활동사항]

류직(柳㮨, 1602~1662)은 29세인 1630년(인조 8)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을 서두르지 않고, 서사(書史)를 탐독하여 『중용(中庸)』과 『대학(大學)』의 연구에 힘썼다. 1635년 황해도의 유생들이 그 시론(時論)을 타서 이이(李珥)의 문묘종사(文廟從祀)를 주장하였는데, 조정의 관리들은 성혼(成渾)까지 문묘에 종사시켜야 한다고 소(疏)를 지어 올렸다. 그러나 인조는 그들의 도덕이 높지 못하다고 승낙하지 않았다.

1650년(효종 1) 다시 성균관 유생 홍위(洪葳) 등 수백 명이 그 주장을 들고 나와, 중외(中外)가 호응하여 사론(士論)이 통일되었다고 주달(奏達)하였다. 이때에 영남에서 반대하는 의견이 일어나자, 류직은 소수(疏首)로 유생 800여 명과 함께 서울에 올라와서 상소하였다. 이에 성균관에서는 류직의 이름을 유적(儒籍)에서 삭제하고 부황(付黃)의 벌까지 내렸다. 이때부터 류직은 세상일에 뜻을 버리고 집에 ‘백졸암(百拙庵)’이라는 편액(扁額)을 걸었다.

그 뒤 성균관에서 부황을 해제할 것을 상소하여 벌을 모두 해제받았으나 다시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문인들과 더불어 도학(道學)을 강론하였으며, 원근의 선비들과 인읍(隣邑)의 수령들이 찾아와서 가르침을 청하고 공경하였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는 문집인 『백졸암집(百拙庵集)』 4권 2책이 있다. 『백졸암집』에 실린 「여향교회중서(與鄕校會中書)」와 「답김생계광서(答金甥啓光書)」, 「여병산노림동주서(與屛山魯林洞主書)」는 당시 안동 지방 선비 사회의 현안 문제와 분위기가 어떠했는지를 알게 해 준다. 「답당생김연서(答堂甥金埏書)」에서는 자신의 공부 방법을 소개하였다. “먼저 『중용』과 『대학』을 익숙하게 입에 올릴 수 있을 때까지 열심히 외웠고, 다음으로는 『심경(心經)』을 오랫동안 읽고 연구했으며, 근래에는 『주역(周易)』에 침잠하고 있다”라며 공부 방식과 순서를 적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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