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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400947
한자 安東定齋宗宅
영어음역 Jeongjae Jongtaek
영어의미역 Head Residence of Ryu Chimyeong
이칭/별칭 양파구려
분야 생활·민속/생활,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임동면 수곡리 1037-3[경동로 2661-8]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정진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문화재 지정 일시 1985년 8월 5일연표보기 - 안동 정재종택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2호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12년 10월 22일연표보기 - 안동 정재종택 경상북도 기념물 제170호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21년 11월 19일 - 안동 정재종택 경상북도 기념물 재지정
성격 고가
양식 홑처마 맞배지붕
건립시기/일시 1735년(영조 11)연표보기
정면칸수 6칸(정침)|5칸(대문채)|7칸(행랑채)|3칸(사당)
측면칸수 6칸(정침)|1칸(대문채)|1칸(행랑채)|2칸(사당)
소재지 주소 경상북도 안동시 임동면 수곡리 1037-3[경동로 2661-8]지도보기
소유자 류성호
문화재 지정번호 경상북도 기념물

[정의]

경상북도 안동시 임동면 수곡리에 있는 조선 후기 전통 가옥.

[개설]

수곡(水谷)은 경상북도 안동에서 동쪽으로 20㎞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마을로 우리말로는 ‘무실’이라고 한다. 수곡마을은 전주류씨(全州柳氏) 수곡파(水谷派) 일족이 누대를 번성해 온 500년 터전이었으나 1987년 임하댐이 축조됨에 따라 다른 여러 동리와 함께 수몰되어 일족들은 각처로 이주하게 되었다. 1987년을 전후로 하여 80여 호는 경상북도 구미시 해평면 일선리로 이주하였다. 차마 고향을 떠나지 못한 이들은 수몰되지 않은 주변의 마을에 새로운 삶의 터전을 잡았는데, 안동 정재종택도 이러한 경우에 속한다.

안동 정재종택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의 연원적전(淵源嫡傳)이라 일컬어지는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 1777~1861)의 종택으로, 증조부인 양파(陽坡) 류관현(柳觀鉉)이 건립하였다. 류관현은 문과에 급제해 벼슬이 형조참의에 이르렀는데, 지방관으로 재직할 때에는 선정으로 이름이 높았고 효성과 우애가 남달라 주위의 칭송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안동 정재종택양파구려(陽坡舊廬)라고도 한다.

[위치]

경상북도 안동시 임동면 수곡리 1037-3번지[경동로 2661-8]에 있다. 수곡교(水谷橋)에서 중평이주단지 쪽으로 300m쯤 직진하다가 도로 왼편으로 난 산길로 100m 정도 올라가면 안동 정재종택이 보인다. 안동 정재종택이 자리 잡은 곳은 임하댐 호수가 한눈에 바라다보이는 산 위에 형성된 분지로 ‘구수목’이라 불린다.

[변천]

안동 정재종택은 1735년(영조 11) 류관현이 건립하였다. 원래 경상북도 안동시 임동면 수곡2리 한들에 있었으나 1987년 임하댐 건설로 인하여 현재 위치로 옮겼다. 안동 정재종택 옆에 있는 만우정은 당시 안동군 임하면 사의동에 있었으나 수몰로 인해 현재 위치로 이건하였다.

[형태]

정침과 대문채, 행랑채, 사당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안동 정재종택과 조금 떨어진 곳에는 정재 류치명의 정자인 만우정(晩愚亭)이 자리 잡고 있다. 정침은 정면 6칸, 측면 6칸 크기의 ‘ㅁ’자형 홑처마 기와집으로 남향해 있다. 전면에 2칸통의 사랑방을 중심으로 우측에 연접하여 2칸의 사랑마루를 두었으며, 사랑방의 좌측에 연접하여 각 1칸 크기의 부엌과 갓방을 배치하였다.

갓방 뒤에는 1칸 크기의 고방을 두었는데, 좌측 갓방을 제외한 건물 전면에 반 칸의 퇴(退)를 내었다. 사랑방과 마루의 처마 아래에는 ‘양파구려’, ‘정재’, ‘세산(洗山)’ 등의 편액이 걸려 있다. 이 중 ‘정재’는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의 아버지인 탄와(坦窩) 김진화(金鎭華)가 쓴 글씨이다. 안채로의 출입은 우측면에 낸 중문을 통하게 하여 내외(內外)의 공간을 분리하였다.

안채의 좌측 칸에는 2칸 크기의 부엌과 고방이었던 목욕탕이 연접되어 있으며, 정면에는 2칸통의 안방과 2칸의 마루를 차례로 배치시키고 반 칸의 전퇴(前退)를 두었다. 또한 우측 칸에는 각각 1칸 크기의 마루방과 상방이 연접해 있어 마루는 결국 3칸이 된다. 그러나 마루방은 대청보다 14㎝ 정도 높게 설치되어 있으며 상방과 마루방 사이, 마루방과 대청 사이에는 사분합문을 달아 독자적인 공간을 형성하면서도 필요시 들어 올려 걸쇠에 걸면 개방적인 공간이 된다.

정침의 동쪽으로 대문채를 내었는데 크기는 정면 5칸, 측면 1칸이며 홑처마 맞배지붕이다. 대문채는 가운데에 솟을대문을 두었고, 그 좌우에는 각 2칸 크기의 고방과 문간방이 딸려 있다. 정침의 서쪽에는 행랑채가 동쪽의 대문채와 마주 보고 있다. 행랑채는 정면 7칸, 측면 1칸의 홑처마 맞배지붕집으로 ‘ㅡ’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다.

행랑채에는 좌로부터 창고·외양간·부엌·고방 등을 두었으며, 행랑채 좌우에는 각 1칸 크기의 화장실을 두었다. 정침의 동쪽에 자리 잡은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 크기의 홑처마 맞배지붕집으로 사당 앞에는 외문(外門)을 내고 주변을 담으로 둘렀다. 사당 내부에는 불천위(不遷位)인 정재 류치명의 신주를 비롯하여 4대의 신주를 봉안하고 있다.

[현황]

1985년 8월 5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2호로 지정되었다. 2012년 10월 22일 경상북도 기념물 제170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경상북도 기념물로 재지정되었다. 2009년 현재 소유자 및 관리자는 류성호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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