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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교구 가톨릭농민회 사건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400492
한자 安東敎區-農民會事件
영어의미역 Democracy Movement of Andong Catholic Famers' Association
이칭/별칭 오원춘 사건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강윤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민주화운동|농민운동
발생(시작)연도/일시 1979년 5월연표보기
종결연도/일시 1979년 12월 8일연표보기
발생(시작)장소 경상북도 영양군
관련인물/단체 오원춘|천주교 안동교구|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가톨릭농민회

[정의]

1979년 오원춘 사건을 계기로 안동교구 사제단이 중심이 되어 일어난 농민운동.

[역사적 배경]

1970년대 중반부터 정부는 농업 생산을 늘리기 위해 신품종 강제 경작을 추진하였다. 이에 적극적으로 농민운동을 전개해 온 가톨릭농민회는 쌀 생산비 보장 운동과 농협 민주화 운동을 중심으로 정부의 획일적인 영농 행정에 대응해 왔다. 안동교구 가톨릭농민회 사건은 이러한 가톨릭농민회 활동과 정부 및 농협 간의 갈등이 전면적으로 표출된 사건이다.

[발단]

1978년 경상북도 영양군 청기면 농민들은 영양군과 농협에서 알선한 감자 씨를 심었으나 싹이 나지 않아 농사를 망치게 되었다. 이에 가톨릭농민회 청기분회 회원들은 피해 농민들과 함께 대책을 논의한 뒤 피해 상황을 조사하여 보상을 요구하였다. 농민들의 끈질긴 활동과 천주교 안동교구 사제단의 지원으로 생각보다 빨리 피해액을 전액 보상받았다. 그런데 1979년 5년 5일 이 보상 활동에 앞장섰던 청기분회장 오원춘이 20일 동안 실종된 사건이 발생하였다. 집으로 돌아온 오원춘이 자신이 납치되어 감금 테러를 당했다는 사실을 천주교 안동교구에 밝히면서 안동교구 가톨릭농민회 사건이 불거지게 되었다.

[경과]

1979년 5월 5일 오원춘은 신원을 알 수 없는 2명에게 납치되어 울릉도에 감금되었다가 20일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이에 오원춘은 6월 13일 진실을 밝히는 선언을 하였고, 천주교 안동교구는 「짓밟히는 농민운동」이라는 문건을 제작하여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조직을 통해 7월 17일 전국에 폭로하였다. 그러나 경상북도지방경찰청은 천주교 안동교구가 허위 사실을 유포하고, 농민운동을 탄압한다는 왜곡된 성명서를 배포했다는 혐의로 신부들과 가톨릭농민회 간부를 구속하였다.

이윽고 대통령의 특별조사령이 발포되었고, 가톨릭농민회와 교회에 대한 비방과 음해가 거세지면서 이 사건은 전국적 정치 투쟁으로 확산되었다. 8월 6일 안동시 목성동성당에서는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한 120여 명의 사제와 600여 명의 가톨릭농민 회원 등이 참석한 가운데 기도회를 열었다. 기도회가 끝난 후 참가자들은 「순교자 찬가」를 부르며 성당에서 나와 안동시청 분수대까지 구속자 석방과 농민운동 탄압 중지, 긴급조치·유신헌법 철폐 등의 구호를 외치며 안동 최초로 가두 촛불시위를 벌였다.

그런 뒤 사제단과 가톨릭농민회원 80여 명은 목성동성당으로 돌아와 무기한 항의 농성에 들어갔다. 당시 언론 매체들은 죽창으로 무장한 폭도들이라고 보도했지만, 안동 시민들은 저녁이면 거리에 나와 농성장에서 나오는 옥외 방송을 들으며 더위를 식혔고 경찰의 포위망을 뚫고 격려 방문을 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았다. 8월 9일 원주시와 청주시에 이어 8월 20일에는 명동성당에서 1만여 명이 모인 가운데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주최 전국 최대의 기도회가 열렸다. 기도회는 인천광역시를 비롯하여 수원시, 광주광역시, 전주시, 마산시 등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결과]

오원춘은 긴급조치 위반죄로 징역 2년형을 선고 받았다. 그러나 개학을 하자 대구 지역에 소재한 경북대학교·계명대학교·영남대학교 학생들이 YH사건과 이 사건을 이슈로 삼아 대규모 시위를 벌였고, 이는 부마항쟁으로 이어지면서 결국 1979년 10월 26일 유신독재는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유신정권이 무너지자 12월 8일 긴급조치가 해제되어 오원춘은 석방되었다.

[의의와 평가]

농민운동 차원에서 시작된 안동교구 가톨릭농민회 사건은 유신독재에 반대하는 민주화 정치 투쟁으로 발전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농민의 정치 투쟁으로 1970년대의 절정을 이루는 이 사건은 유신독재 종식에도 큰 몫을 하였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1.07.15 내용 혼동 우려 집으로 돌아온 오원춘이 천주교 안동교구에 납치되어 감금 테러를 당했다는 사실을 밝히면서 안동교구 가톨릭농민회 사건이 불거지게 되었다. ->집으로 돌아온 오원춘이 자신이 납치되어 감금 테러를 당했다는 사실을 천주교 안동교구에 밝히면서 안동교구 가톨릭농민회 사건이 불거지게 되었다.
이용자 의견
관** 안녕하세요? 디지털안동문화대전 관리자입니다. 고견에 감사드립니다. 말씀하신 부분에 대한 수정을 완료하였음을 알려드립니다. 앞으로도 안동문화대전에 대한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2011.07.15
김** 위의 내용중에서 " 집으로 돌아온 오원춘이 천주교 안동교구에 납치되어 감금 테러를 당했다는 사실을 밝히면서 안동교구 가톨릭농민회 사건이 불거지게 되었다."는 문장은 잘못읽으면 마치 오원춘이 천주교 안동교구에 납치되어 감금 테러를 당했다는 걸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수정하면 그 뜻이 명확해질 것 같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오원춘이 '자신이 납치되어 감금 테러를 당했다는 사실'을 천주교 안동교구에 밝히면서 안동교구 가톨릭농민회 사건이 불거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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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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