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옹천역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400412
한자 甕泉驛
영어음역 Ongcheonnyeok
영어의미역 Ongcheon Station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
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김명자(역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제정연도/일시 조선 전기
시행연도/일시 조선 전기
폐지연도/일시 1884년연표보기

조선시대 안동 지역에 설치된 교통 및 통신 기관.

[개설]

역(驛)은 신라 소지왕 9년(487)에 처음 시작되었다고 하며, 고려 성종 때 더욱 구체화되었는데, 이때 전국 22도(道)에 525개소의 역이 구성되었다. 고려 공양왕 20년(1390) 중앙의 외방지역 역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중앙관을 파견하는 것을 골자로 한 역승제(驛丞制)를 조준(趙浚) 등 개국공신들의 건의에 따라 시행하게 되면서 확립되었다.

나아가 역은 30리마다 하나씩 설치한다는 원칙에 입각하여 주로 대로변의 주현(州縣) 각 읍에 역참을 설치했다. 각 역에는 말과 역장(驛長), 역정(驛丁)이 있다. 조선 세조 3년(1457)에 538개 역을 설치하고 이를 40구역으로 나누어 각각 찰방(察訪)을 두었다. 찰방이 주재하는 역을 찰방역이라 하며, 찰방은 관내의 소속된 역을 통할했다.

조선 후기에는 모든 역승(驛丞)이 찰방으로 승격되고 40도 546역으로 개편되었다. 이때는 모든 역에 찰방이 있어 찰방이 역장의 일도 겸하게 되어 있어 교통과 통신 업무를 같이 관할하였다. 찰방은 유사시에 병력을 동원할 수도 있었다. 순흥, 풍기, 영천(榮川) 세 고을을 통틀어 찰방역은 창락역(昌樂驛) 한 군데뿐이었다. 1884년(고종 21) 서울에 우정총국이 창설되면서 역 제도는 없어졌다.

[제정경위 및 목적]

원활한 공문서(公文書)의 전달, 관리(官吏), 외국 사신의 왕래 숙박, 말을 공급하여 관물(官物)의 수송 등을 돕기 위하여 옹천역을 제정하였다.

[내용]

옹천역안동부(安東府)의 북쪽 34리(지금의 북후면 옹천리)에 있었다. 북으로 영천(榮川: 지금의 영주) 평은역(平恩驛)이 30리, 봉화(奉化) 도심역(道深驛)이 50리에 있다. 옹천역은 대마 2필, 중마 2필, 복마 10필을 갖추고 있었으며, 역리 582명과 노(奴) 2명이 소속되어 있었다.

옹천역과 관련하여 김구용(金九容)의 시가 전하고 있다.

“말 타고 나아가니 앞의 풍경은 나그네 마음을 괴롭히고/ 시내와 산의 경치는 가는 곳마다 그림 같구나/ 시를 읊으며 우거진 수풀 사이 천천히 가노라니/ 홀연히 매화 한 그루가 눈부시게 서 있네.(馬首風炯憣客情 溪山到處畵圖成 哦詩緩緩行芳草 忽有梅花一樹明)”

[변천]

조선시대의 역로는 역도(驛道)-속역(屬驛) 체계를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역도는 도로의 상태와 중요도 및 산천의 거리에 따라 여러 개의 역을 묶어 역승(驛丞)이나 찰방(察訪)의 지휘 감독 아래 순행(巡行), 고찰(考察)하면서 역을 관리하는 체계를 말한다. 이 역도는 고려 초기의 6과 체제가 22역도 체제로 편제되면서 성립되었다.

조선은 고려의 이러한 체계를 계승하면서 점차 역의 신설과 역도를 개편하여 역에 대한 국가의 관리를 강화하였다. 1413년(태종 13) 9월 서북면의 생양관(生陽館)에서 의순관(義順館)까지 역승을 임명하고, 또 금교참(金郊站)에서 경천참(敬天站)까지는 관승(館丞)을 임명하여 그들의 관리 아래 역을 관장하도록 하였으며 이와 함께 역도도 개편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 1413년 10월에는 경기도의 일부 역도를 개편하였는데 마산도(馬山道)를 청파도(靑坡道), 금곡도(金谷道)를 중림도(重林道), 풍해도칠참(豊海道七站)을 동선보산도(洞仙寶山道)라 개편하고 동시에 청교도(靑郊道)를 하나 더 증설하였다. 1414년(태종 14)에는 평구도(平丘道)를 복치하고 이듬해 4월에는 풍해도구참(豊海道九站)에 관승 1인을 더 두어 금교경천도관승(金郊敬天道館丞)이라 하였다. 1417년 10월에는 관승을 혁파하고 찰방 체제로 바꾸었다.

1432년(세종 5) 7월 경상도의 황산도(黃山道)·성현도(省峴道)를 설치하고 역승을 파견하였으며 태조 이후 세종대에 걸쳐 동북 지방의 개척에 따라 새로운 역을 설치하여 함길도의 역로조직도 새롭게 편성되었다. 함길도에는 고산도(高山道)·시리도(施利道)·주천도(酒泉道)라는 3개의 역도가 편성되었다.

세종대에는 함길도뿐만 아니라 경기 및 경상도 지방의 역도 체제를 정비하여 거의 전국적 규모의 역로를 조직하였다. 이때 경상도 창락도(昌樂道)에는 역승이 8명이 있고, 속역은 순흥(順興)에 창락(昌樂)·순흥신역(順興新驛), 영천(榮川)에 창보(昌保)·평은(平恩), 안동(安東)에 유동(幽洞)·안교(安郊), 예천(醴泉)에 통명(通明), 봉화(奉化)에 도심(道深)이 있다. 세종대의 역도체계는 세조대에 대폭적인 개편을 하게 된다.

완성된 조선의 역은 대(大)·중(中)·소로(小路)로 나누고 각 역에는 공해(公廨), 즉 역사(驛舍)를 축조하여 각 역민(驛民)의 역할에 따른 역의 업무를 집행하였다. 이 때 경상좌도의 창락도는 속역이 9개로 통합되었다. 영천(榮川)에 평은(平恩)·창보(昌保), 안동(安東)에 옹천(瓮泉)·유동(幽洞)·안교(安郊), 예천(醴泉)에 통명(通明), 봉화(奉化)에 도심(道深), 풍기(豊基)에 죽동(竹洞), 예안(禮安)에 선안(宣安)이다.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