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산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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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무렵 오미리에도 근대교육의 물결이 밀려들었는데, 그 출발은 오릉학술강습소이다. 오릉학술강습소는 김헌섭(金憲燮)의 발기로 창설되었으며, 초대교장은 김병택(金秉澤)이었다. 설립 당시에는 지금의 죽암서실에 교사를 마련하였다가 이후 도림강당으로 옮겼으며, 그런 다음 현재의 화수당(오릉학술강습소)으로 이건하였다. 오릉학술강습소에서는 보통과정(지금의 초등과정)을 가르쳤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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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안동 출신의 독립운동가. 본관 풍산(豐山), 자는 회일(會一)이다. 1894년(고종 31)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풍산김씨 동성마을인 오미리에서 출생하였다. 김만수는 1913년 만주로 망명하여 길남장(吉南庄)의 군사가 되었다. 길남장은 1918년 봄 안동 출신으로 만주 지역 최고 지도자인 이상룡(李相龍)이 화전현에 설치한 병영이다. 그 후 김만수는 19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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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안동 출신의 문신.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사흥(士興), 호는 지촌(芝村). 증조부는 약봉(藥峯) 김극일(金克一), 할아버지는 김철(金澈), 아버지는 김시온(金是榲), 어머니는 풍산김씨(豊山金氏)로 지평 김봉조(金奉祖)의 딸이다. 김방걸은 현재의 경상북도 안동시에서 태어났다. 1660년(현종 1)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정자에 제수되었다. 1662년 제원도찰방(濟原道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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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안동 출신의 유생.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이승(以承), 호는 표은(瓢隱)·도연(陶淵). 할아버지는 김수일(金守一), 아버지는 김철(金澈), 어머니는 풍산김씨(豊山金氏)로 고려삼사좌윤(高麗三司左尹) 김안정(金安鼎)의 후손이며 지평 김봉조(金奉祖)의 딸이다. 아버지 김철은 백부 김극일(金克一)의 후사가 되었다. 김시온은 현재의 경상북도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에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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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미리의 지명유래는 마을 진입로에 서 있는 오미마을표지석에 자세히 적혀 있다. 즉 원래는 다섯 가닥의 산줄기가 뻗어 있다고 해서 오릉동(五陵洞)이라 불렀으나, 허백당 김양진의 아들 김의정이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고향으로 돌아와서 오릉동을 오무동(五畝洞)으로 고쳤다고 한다. ‘능(陵)’이란 글자가 언덕을 일컫기도 하지만 임금의 무덤을 뜻하기도 해서 ‘이랑무(畝)’ 자를 넣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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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시 풍산읍 오미리는 풍산김씨들이 세거하고 있는 동족촌락이다. 풍산김씨 조상들의 묘소는 인근 예천군 호명면 직산리의 대지산에 있는데, 산자락 아래에는 제례도구를 보관해 두거나 제물장만 등을 하는 대지재사가 자리하고 있다. 풍산김씨 문중에서는 대지산 묘역 수호를 위한 규칙을 제정해 두고 있다. 이른바 「대지곡묘산수호입의(大枝谷墓山守護立議)」라는 묘지 수호 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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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경상북도 안동 지역에 형성된 성이 같은 사람이 모여 사는 마을. 1930년대의 한 조사에 따르면 당시 우리나라의 마을 총수는 28,336개로 이 가운데 14,672개가 동성마을이었다. 우리의 전통마을 가운데 반 이상이 동성마을인 셈이다. 동성마을은 동족부락(同族部落)이라고도 하는데, 이 말은 1930년대부터 주로 일본인 학자들이 사용하면서 일반화된 용어이다. 그러나 동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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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미리의 동제는 음력 정월 열나흗날 자정에 지낸다. 서낭당이 세 곳이기 때문에 제관 역시 세 명을 선출하는데, 이를 ‘삼제관’이라고 한다. 기혼 남성 가운데 상주가 아닌 사람이라면 누구나 제관이 될 수 있다. 특별한 절차가 있는 것은 아니고, 마을 어른들이 상의하여 결정하는 편이다. 신분의 구별이 뚜렷했던 시절에는 주로 아랫사람들이 제관을 맡았으며, 풍산김씨들이 제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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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안동 지역에서 지내고 있는 묘소에서의 제례. 묘사(墓祀)는 음력 10월에 5대 이상의 조상 무덤에서 지내는 제사이다. 이를 시향제(時享祭) 또는 무덤 앞에서 지내는 제사라고 해서 묘제(墓祭)라고도 한다.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는 풍산김씨들이 세거하고 있는 동족촌락이다. 풍산김씨 조상들의 묘소는 인근 예천군 호명면 직산리의 대지산에 있으며, 산자락 아래에는 제례 도구를 보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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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에 있는 조선 후기 전통 가옥. 삼벽당은 소유자의 7대조인 김상구(金相龜, 1743~1814)가 분가할 때 건립한 가옥이다. 당호는 김상구의 아들로 동몽교관(童蒙敎官)과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김종한(金鐘漢)의 호에서 따온 것이다.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는 풍산김씨들이 500년 동안 세거해 온 동성 촌락으로서, 학가산의 지맥인 죽자봉을 뒤로 하고 검무산을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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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에 있는 조선 중기 전통 가옥. 안동 풍산김씨 종택은 안동 풍산김씨의 대종가(大宗家)로, 집의 이름은 유경당(幽敬堂)이다. 안동 풍산김씨 종택을 창건한 유연당(悠然堂) 김대현(金大賢, 1553~1602)은 성혼(成渾)의 문인이다. 사마시에 합격한 후 상의원직장(尙衣院直長), 산음현감 등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에는 고향에서 향병을 모아 안집사(按集使) 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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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대학교 박물관에서는 안동시 정상동 일대의 택지 개발과 관련한 발굴 도중, 조선시대 미라와 함께 당시의 복식이 묻혀 있는 무덤을 발굴하였다. 미라의 주인공은 고성이씨(固城李氏) 이응태(李應台, 1556~1586)로 장례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특히 무덤에서 나온 애절한 필치로 쓴 ‘원이 엄마의 한글 편지’와 ‘머리카락으로 삼은 미투리’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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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의 조상 제사에는 고조부·증조부·조부·부(父)까지의 4대조를 위한 기제(忌祭)를 비롯하여 불천위제사(不遷位祭祀)·차례(茶禮)·묘제(墓祭) 등이 있다. 이 중 불천위제사는 종가(宗家)의 위상과 정체성을 확립시켜 주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그 때문에 항간에는 불천위 조상을 모시고 있어야만 종가의 자격을 부여하는 경향이 강하다. 특히 안동 지역에서는 불천위를 모시고 있는 종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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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에 있는 조선 후기 전통 가옥. 안동 풍산김씨 영감댁을 처음 건립한 김상목(金相穆)은 조선 후기 규장각직각(奎章閣直閣)을 지냈으며, 후에 증축한 학남(鶴南) 김중우(金重佑, 1780~1849)는 조선 후기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다. 안동 풍산김씨 영감댁이라는 명칭은 김중우의 아들인 낙애(洛厓) 김두흠(金斗欽, 1804~1877)이 동부승지(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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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덕가」는 유교적 전통과 종족의식이 강한 동성마을에서 주로 전하는 교훈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가사작품을 말한다. 오미리의 풍산김씨 집안에서 전해 오는 「세덕가」를 지은 사람은 김병철(金秉喆, 1881~1951)이라고 한다. 김병철은 김봉조(金奉祖)의 후손으로, 당대 손꼽히는 한학자였으며 숭조의식도 각별했던 것으로 전한다. 「세덕가」는 김병철이 40세 되던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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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안동 지역에서 각종 잔치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린 기록화. 안동 지역에 전하는 대표적인 연회도(宴會圖)로는 풍천면 오미마을에서 발견된 풍산김씨의 내력이 실려 있는 『세전서화첩(世傳書畵帖)』이 있다. 『세전서화첩』에 수록되어 있는 주요 연회도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제2화 「허백당공 동도문희연도」는 김양진이 김안로의 배척을 받아 1526년(중종 21) 경주부윤으로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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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에 있는 법정리. 풍산김씨(豊山金氏) 500년 세거지로, 조선 초기에 풍산김씨 시조 김문적(金文迪)의 8세손 김자순(金子純)이 처음 마을에 정착하면서 ‘다섯 가닥의 산줄기가 뻗어 내려 있다’고 하여 오릉동(五陵洞)이라 하였다가, 후손 의정공(義貞公)이 을사사화 후에 낙향하여 ‘능(陵)’이란 글자가 언덕을 뜻하지만 임금의 무덤을 뜻하기도 하므로 이랑 ‘무(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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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에 있는 풍산김씨 동성마을. 김대현(金大賢)의 아들 8형제가 모두 진사시에 합격하고 5형제가 문과에 급제하자 인조가 ‘팔련오계(八蓮五桂)’라고 하면서 ‘오미(五美)’라는 마을 이름을 내렸다. 경주 출신의 김연성이 관직에 있으면서 풍산 석릉촌(石陵村)에 와 있던 중 오미리에 별서(別墅)를 마련한 뒤로 현손인 김자순(金子純)이 서울 장의동에서 오미리로 낙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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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미리에는 근대사의 발자취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일록(日錄)이 다수 전해지고 있다. 그 중에서 을미년과 병신년에 발생한 안동 의병운동을 기록해 둔 이른바 『을미병신일록』이 가장 주목된다. 『을미병신일록』의 저자는 김정섭(金鼎燮)이다. 그는 병신년에 예안 의진에서 의병부장으로 활동했던 이중린(李中麟)의 사위이면서 동시에 영감댁의 주손이었다. 또한 상해임시정부 국무령을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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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산읍의 소재지인 안교리에는 사성정(四姓井)이라 불리는 우물이 있다. 말 그대로 ‘4개 성씨의 우물’이라는 뜻인데, 구체적으로는 풍산을 본관으로 하는 풍산김씨와 풍산류씨, 풍산홍씨, 풍산심씨 들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우물이었다고 전한다. 이들 가운데 풍산홍씨와 풍산심씨는 이미 1백여 년 전에 풍산을 벗어나, 현재 풍산김씨와 풍산류씨만이 세거하고 있다. 정확히 언제, 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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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안동 지역에서 돌아가신 조상이나 특정한 신명(神明)을 받들어 복을 빌기 위해 행하는 추모 의례. 안동 지역 조상 제례 역시 절차와 내용 등에서는 『예서(禮書)』를 크게 벗어나지 않고 전국적 보편성을 보이고 있는 편이다. 다만 여타 지역에서 나타나지 않는 측면이 있다면, 안동이 위치한 지리적 특징에 따른 제물의 독특함이라 할 수 있다. 안동 지역 제례의 절차는 원칙적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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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미리 풍산김씨 문중에 전해 오는 것으로 『세전서화첩(世傳書畵帖)』이 있다. 2009년 현재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되어 있는 『세전서화첩』의 편찬자는 김중휴(金重休)로, 1797년 오미리에서 태어나서 1863년에 숨을 거두었다. 『세전서화첩』은 건(乾)과 곤(坤) 2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가로 26.5㎝, 세로 36.0㎝이다. 수록된 그림은 풍산김씨 10세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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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미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이 유난히 많이 태어난 마을이다. 일본 왕이 살고 있는 황궁에 폭탄을 던지겠다는 일념을 가슴에 안고 현해탄을 건너간 김지섭을 비롯하여 한국 근대사에서 애국운동을 대표할 만한 주요 인물들이 적지 않다. 그럼에도 이들 인물들이 펼친 활약에 비해 큰 주목을 받지 못했는데, 그 까닭은 이들 대부분이 사회주의 노선을 걸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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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이성(而晠), 호는 일봉(一峯). 증조부는 조봉징(趙鳳徵), 할아버지는 조원익(趙元益), 아버지는 성균생원 조규양(趙葵陽), 어머니는 풍산김씨(豊山金氏)로 김달룡(金達龍)의 딸이다. 조석회는 현재의 경상북도 예천군 감천면 둔산리에서 태어났다. 1747년(영조 23) 생원시와 진사시에 모두 합격하였고, 1773년(영조 49) 증광문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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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천위(不遷位)란 ‘옮기지 않는 신위’라는 뜻으로 사대봉사 원칙과 상관없이 자손만대 제사를 받을 수 있는 자격을 일컫는다. 대개 나라에 큰 공을 세우거나 학문적으로 뛰어난 업적을 남기거나 혹은 덕망이 높은 경우 불천위로 추대된다. 이런 이유로 불천위로 지정된 조상을 모시고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가문의 큰 영광이었다. 풍산김씨 허백당 종택에서는 무려 두 분의 불천위를 모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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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적을 시조로 하고 김자순을 입향조로 하는 경상북도 안동시 세거 성씨. 안동의 풍산김씨는 조선 초 김자순(金子純)이 왕자의 난을 피해 풍산현 오릉동에 정착한 후 후손들이 세거하면서 형성된 가문이다. 풍산김씨 시조 김문적(金文迪)은 신라 경순왕의 넷째 아들 김은열(金殷說)의 후손으로 고려 고종 때 나라에 공을 세워 좌리공신(佐理功臣)에 책록되고 풍산백(豊山伯)에 봉군되었다. 김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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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에 있는 조선 후기의 정려각. 풍산김씨 정려각(豊山金氏 旌閭閣)은 류홍춘(柳弘春)의 부인 풍산김씨(豊山金氏)를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교남지(嶠南誌)』에 “남편(류홍춘)이 관의 곡식을 축냈다는 누명을 쓰고 체포되어 욕된 형을 받고 집으로 돌아와 억울함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이에 김씨는 혈서를 써 상경하여 쟁명(錚鳴)을 울리고 진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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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미리에 있는 추원사(일명 도림추원사)는 1758년(영조 34)에 건립되었고, 1806년(순조 6) 현재의 위치로 이건되었다. 도림(道林)은 추원사(追遠祠)가 보림산(甫林山) 도봉(道峯) 아래 자리하고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도림추원사는 김대현(金大賢)과 그의 아들 8명의 학덕과 업적을 추모하기 위하여 건립된 사당으로, 오미리 풍산김씨의 가장 핵심적인 추모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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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적 성향이 강한 집성마을인 오미리에서는 조상의 제례를 중시 여기는 경향이 비교적 강하다. 그러다 보니 격식과 내용에도 비교적 큰 관심을 기울이는 편이다. 그러나 가가례(家家禮)라는 말도 있듯이, 가문마다 예법이 다른 까닭에 적절한 지침을 세워 두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오미리의 풍산김씨 역시 다음과 같은 나름의 제례지침을 마련해 두었다고 한다. 1. 재계와 준비 예문(禮文)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