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2C030203 |
---|---|
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부항면 해인리 해인동 224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재민 |
[해인산장의 아침]
“뚝딱뚝딱~”꼭두새벽부터 해인리에 자리한 해인산장이 시끌벅적하다.
바로 해인산장 주인 김용원[1947년생] 씨가 아침 일찍부터 양손 가득 연장을 들고 산장 내 출입문을 수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 손으로 다 고쳐야지. 이거 전부 다 내 손으로 한 거야.”
김용원 씨의 말처럼 해인산장 어디든 김용원 씨의 손이 처음부터 끝까지 거치지 않은 곳이 없다.
지금은 이렇게 자연을 벗으로 삼아 생활하고 있는 김용원 씨, 그의 인생살이는 누구보다 역동적이며 파란만장했다고 한다.
[도시에서 찾지 못한 행복]
해인리에서 태어난 김용원 씨는 대야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959년 외가가 있는 서울 청량리로 출타하였다.
당시, 마을에서 집성촌을 이루고 있던 광산김씨 집안에서 태어나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외가가 있는 서울로 갔던 것이다.
“지게 그기[그것이] 여덟 구멍이라고 하는데 그때만 해도 아버지가 여덟 구멍을 지고 같이 살자는 기야. 사람은 똑똑하면 일찍 죽는다 그 말인 거야. 여기서 여덟 구멍 지고 같이 농사짓고 살면 오래 살 수 있다 그 말인 기야.”
서울로 간 김용원 씨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공장에서 일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김용원 씨의 지위는 오르게 되고, 공장 사정에 의해서 마침내 그 회사를 경영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사업은 뜻대로 되지 않고, 경제적으로 부담이 늘어나게 되었다. 따라서 경제적인 부담에 따른 정신적인 스트레스로 김용원 씨는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삼도봉을 지키는 산장지기가 되다]
은퇴 후 고향을 다시 찾을 때를 대비해 1986년 지금의 해인산장 부지를 사 두었던 김용원 씨는 1995년 비로소 마을로 돌아오게 되었다.
삼도봉은 일반 사람들에게는 매우 험한 산으로 기억되지만, 등산 학교인 통나무학교를 수료하고 평소 빙벽을 타고 다닌 김용원 씨에게는 평범한 산책 코스에 불과했다.
김용원 씨는 산악인의 마음으로 백두대간이 지나가는 이 자리에 산장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삼도봉 아래에 해인산장을 짓게 되었다.
“그때 들어와서 산장 운영했지. 처음 3년간은 지금 이 장소가 아니고, 마을에서 우리 집 있지? 그 집이 우리 어릴 때 살던 집인데, 거기서 그냥 산장했어. 여기 산장은 1998년 5월 12일부터지.”
[해인산장이 태어나다]
해인산장이 갓 태어난 초기에는 등산객들이 하루 머물다 가는 잠자리와 따뜻한 모닥불만 제공했다.
하지만 차츰 늘어나는 등산객들로 인해 모닥불에 고기를 굽게 되고, 고기를 구우니 술잔을 놓을 자리를 만들게 되어 지금의 고기 불판이 탄생하게 되었다.
“통나무를 반 뚝 잘라 가지고 거기다 솥을 얹어 놓고 모래자갈을 놓고 요 우에다가 참나무 장작을 피웠어. 지나가는 사람 추운데 불 찌고[불을 쬐고] 가라고. 고기 굽기 전이니까 불을 찌고 커피 한잔 하고 다 갔는데, 그때 나무 다 타고 숯이 이글이글하는 거야. 그래서 인제 여 고기 구워 먹으면 되겠다고 고기를 구워 먹었는데, 전[식탁]이 없으니까 술잔 놓을 자리가 없잖아. 그 다음 합판을 둥그렇게 만들어 가지고 모자 씌우듯이 팍 씌우니까 술잔을 놨는기라. 먹다 보니까 지나가는 사람이 와서 같이 고기도 먹고 술 한 잔 하고. 그 사람이 다음에 와 가지고 지난번에 구워 먹었는 거 맛있었는데, 그거 한 번 더 하자 이래 된 거야. 그게 인제 늘고 늘고 해 가지고 이게 돼지고기를 굽게 된 거야.”
네모난 식탁의 중간을 뚫고, 구멍에다가 자동차 휠을 넣은 다음 숯을 집어넣어 만든 식탁은 산장지기 김용원 씨의 손길이 닿지 않았으면 나오지 않았을 발명품이다.
이토록 산을 사랑하고 등산객들을 사랑하는 김용원 씨에게 앞으로의 바람에 대해서 물어 보았다.
“삼도봉에 가면 선바음달이라고 협곡이 있어. 나는 거기에다 빙벽도 만들고 싶고, 눈썰매장도 하나 만들고 싶어. 그게 내 꿈이야.”
[정보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