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2B0301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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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구성면 상원리 원터마을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최경호 |
[일제 강점기 만주에서 땅을 개간하다]
이순영[1926년생] 씨는 원터마을에서 태어나 16세의 늦은 나이에 보통학교[지금의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집에서 농사일을 거들었다. 그러던 중 18세가 되던 해 만주 길림성 지역으로 가게 되었다. 당시는 일본이 우리나라에 조선척식회사(朝鮮拓殖會社)를 세운 것과 마찬가지로 만주 지역에 만주척식회사(滿洲拓殖會社)를 만들어 놓고 수많은 조선 사람들을 만주로 보내던 때로, 이순영 씨 또한 이런 과정에서 집안 형님과 함께 만주로 들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길림에 무슨 만척[만주척식회사의 줄임말] 카는 게 있었는데, 하여튼 우리나라 사람들이 만주로 가서 땅을 개간해 가지고 그렇게 먹고살아라 하는 그런 게 있어. 만척, 만척 해 샀는데, 그걸 해야 돼.”
이순영 씨는 당시 고향에서는 학교도 멀었지만 형편이 넉넉지 못해서 중학교에 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하지만 길림으로 들어가서는 일도 하고 학교도 다닐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2년 동안 학교를 다니다가 졸업도 못하고 해방이 됐잖아. 그냥 만주에 있었으면 내가 만주족, 중국 조선족이 됐을낀데. 그때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됐는기라. 근데 내가 방학이라고 고향에 왔어. 8월 13일이 방학이라 고향에 와서 해방을 맞이하게 됐는기라. 그래서 여 와서 살게 됐잖아. 그때가 스무 살 때였제.”
해방 전 우리나라 사람 중에 해외로 이주한 사람이 많았는데, 대개 이들은 고향 땅에서 먹고살기 힘든 사람들인 경우가 많았다. 이들 중에는 막노동이라도 하기 위해 현해탄을 건너기도 했고, 농토 개간할 곳을 찾아 압록강과 두만강을 몰래 넘기도 했다. 그 중에는 만주로 건너간 사람들도 많았다. 이순영 씨와 집안 형님들도 만척의 모집에 응해 가재도구를 이고 지고 만주 땅으로 건너간 경우이다.
당시 이들의 이주는 대개 나라를 가지지 못한 설움 때문이었다. 따라서 많은 사람이 해방에 임해 귀국을 했지만, 만주로 건너간 사람들의 경우 중국 대륙에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면서 돌아오고 싶어도 돌아오지 못하고 지금까지도 ‘조선족’으로 살아오고 있다. 이순영 씨의 경우도, 해방이 되고 나서도 계속 만주 땅에서 농토를 개간하고 살았다면 지금까지도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조선족’으로 살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오전에는 국방경비대에서, 오후에는 국군준비대에서]
해방이 되자 이순영 씨는 ‘집구석’에만 붙어 있을 수가 없어 자꾸만 밖으로 나돌아 다녔다. 그러던 중 김천에서 국방경비대를 모집하는 공고를 보고 그곳을 찾아갔다.
“스무 살 땐가, 스물한 살 땐가는 잘 모르겠고, 그때 국방경비대에서 무슨 모집을 한다 그래. 그래서 가 보니까 영어 학교라. 거기를 댕겼어.”
미군정은 1945년 12월 5일 군사영어학교를 창설하고 미국식 교육 방법에 따라 군인을 양성했으며, 1946년 1월 15일에는 대한민국 육군의 전신인 남조선국방경비대를 발족시켰다. 또 다른 한편에서는 일제에 의해 강요되던 학병과 징병을 피해 산으로 도피해 있던 조선인 청년들이 해방 직후 하산하여 국군을 조직하려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이 조직한 좌익 계열의 군사 조직이 바로 국군준비대이다.
이순영 씨는 오전에 영어 학교를 다녔는데, 그러던 중 김천 남산병원 앞에 있던 한 가정집에 ‘한글 강습소’라는 간판이 붙어 있는 보게 되었다. 배움에 굶주려 있던 이순영 씨는 어떻게든 공부를 하겠다는 일념으로 그곳을 들어가 봤는데, 가서 보니 그곳은 국군준비대에서 사람들을 모집하여 공부를 가르치고 있었다.
그때부터 이순영 씨는 약 6개월 동안 오전에는 국방경비대에서 운영하는 영어 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오후에는 국군준비대에서 개설한 한글 강습소를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한글 강습소를 갔더니 문이 잠겨 있어서 옆에 있던 사람에게 물어 봤더니, 이렇게 대답을 했다고 한다.
“그 양반 참 소식이 깜깜하네. 어제 저녁에 이곳이 습격을 당해서 사람도 다치고 문을 닫았어요. 이 한글 강습소가 빨갱이들이라.”
이순영 씨는 그제야 우익이니 좌익이니 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즉, 국군준비대는 좌익 계통이고 국군경비대는 우익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조금씩 세상의 이치를 깨닫게 되었던 셈이다.
[6·25 전쟁의 상흔을 뒤로하고]
이후 이순영 씨는 국군경비대의 장교 시험에 응시했지만 떨어지고 사병으로 입대했다. 마을 청년 대여섯 명이 같이 입대했으나, 이순영 씨는 장교가 되지 못한 것이 못내 가슴에 응어리져서 군대의 담을 넘어 고향으로 돌아와 버렸다고 한다. 그 뒤 대구에서 경찰관 시험에 붙어 경찰 생활을 하다가 몸에 병이 들어 경찰을 그만두고 고향집으로 돌아와 있던 중에 6·25 전쟁이 일어나서 밀양으로 피란을 떠났다.
피란에서 돌아오니 고향 집은 폭탄을 맞아서 반파가 되어 있었다. 그는 집을 수리한 후에 논농사를 지으면서 더불어 정미소를 차려 생활하기도 했다.
6·25 전쟁이 끝나자 그는 한동안 고향에서 농사를 짓다가 김천으로 나가 직장 생활도 해 보고, 한동안은 ‘광산에 바람이 들어’ 광산으로 쫓아다니기도 했다. 젊은 시절에는 배움과 지식에 대한 욕심, 돈 욕심에 많은 곳을 떠돌아 다녔지만, 나이가 들고 보니 모든 것이 부질없게 느껴졌다. 그리하여 세상이 허망하게 느껴지던 50세 즈음 그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안착했고, 지금까지 이곳을 벗어나지 않고 살고 있다고 말했다.
[정보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