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2A0202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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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개령면 동부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송기동 |
[전략적 요충지 동부리]
동부리를 감싸고 있는 감문산에 오르면 멀리 마을을 회오리쳐 흐르는 감천과 드넓게 펼쳐진 개령들, 감문산으로부터 뻗어 내린 관학산과 유동산이 어우러져 마치 한 폭의 동양화를 펼쳐 놓은 듯 아름답기만 하다.
그러나 이곳이 지금으로부터 418년 전 동부리를 비롯한 개령 읍민 절반이 희생된 비극의 현장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개령 동부리 일대는 수로와 육로가 발달한 교통 요지이다. 이로 인해 삼한 시대 감문국으로부터 신라,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전략적인 요충지로 주목을 받았으며, 또한 그 때문에 영예와 수난의 역사를 함께 간직하고 있다. 가장 큰 영예가 감문국의 도읍지였다는 사실이라면 가장 큰 수난은 임진왜란 때 왜군의 후방사령부가 설치되었던 것이다.
[동부리로 몰려온 왜병들]
1592년(선조 25) 4월 14일 김해에 상륙한 왜군 제7진 3만 명은 왜장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의 지휘에 따라 창원, 창녕, 무계를 거쳐 성주에서 잠시 머물렀다. 그러고는 6월 12일 개령으로 옮겨 후방사령부를 설치하고 경상도 일원의 치안과 군수 물자 보급을 담당하였다.
당초 왜군은 성주성을 후방사령부로 생각했으나 의병의 저항이 예상외로 심하자 주요 교통로인 추풍령에 인접한 개령으로 사령부를 옮겼던 것이다.
지례의 의병장 여대로(呂大老)가 저술한 『감호문집(鑑湖文集)』에 따르면, 개령의 왜군 사령부는 지금의 동부리를 중심으로 감문산과 유동산, 관학산을 연결하는 8리[약 11㎞] 둘레로 두 겹의 나무 울타리를 치고 울타리 사이에는 해자를 파서 물을 채우는 구조로 요새화 했다.
울타리 내부는 판자로 다시 구역을 나누었으며, 유동산 아래 동부연당 옆에 왜군 본부를 설치하고는 관학산 자락에 개령 주민 700명 정도를 감금된 채 진지를 구축하거나 군수 물자를 수송하는 데 밤낮으로 동원하였다.
왜군은 개령에서 군정(軍政)을 실시하며 주민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현물로 세금까지 징수했는데, 의성군 비안에서 발견되어 『김천시사』에 실려 있는 포고문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당사지(當事地) 일본국 재상은 어명을 받들어 세상을 교화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것이 목적이다. 향내(鄕內) 사람이 산중이나 해외로 피란간 자는 집으로 돌아와 전과 같이 편안히 살게 하라. 일본인이 당인(唐人)의 처자를 빼앗는 자는 포박해서 죽이고 농업에 종사하는 자는 부지런히 밭을 갈고 물을 대며 풀을 뽑아 가을 수확을 기다려라. 조선에서 만약 무기를 가지고 우리 군사의 내왕을 방해한다면 모조리 잡아 형벌할 것이며, 만약 도망한 백성이 하소연할 일이 있으면 기록해서 개령 우리 장군의 진영으로 아뢰라. 이상 조목에 대하여 혹시 의심할지 모르나 하나님이 밝게 내려다보니 절대 허언(虛言)하지 않는다. 천정(天正) 20년 7월 安井 宰相 代理 完戶二次三室 元忠
포고문의 내용 중 “개령 우리 장군의 진영으로 아뢰라.”는 구절을 통해 개령에 사령부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으며, “만약 무기를 가지고 우리 군사의 내왕을 방해한다면 모조리 잡아 형벌할 것이다.”라고 협박을 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동부리 주민들의 억울한 죽음]
조명(朝明) 연합군의 공세와 남해 수군의 선전 등으로 전세가 역전되자 왜군은 1593년(선조 26) 2월 12일, 7개월여 간 운영하던 동부리의 후방사령부를 갑작스럽게 해체하고 남해안으로 철수했다.
이때 왜군은 목책 안에 감금되어 있던 포로 700명 중 300명을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감호문집』에는 “왜병이 물러난 후 군진을 둘러보니 동쪽 봉우리에 까마귀와 솔개가 난잡한데 시신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적군이 도망갈 때 부역한 남녀를 죽인 것이다. 동쪽 목책에 세 사람의 목이 매달려 있고 서쪽에도 한 사람의 목이 달려 있었다. 개령이 경상도에서 가장 적군이 많았는데 그 수가 8만에 이르렀다 함이 거짓이 아닌 것 같다.”라고 당시의 참상을 기록하고 있다.
동부리에 이렇듯 왜군의 후방사령부가 설치되어 있었기에 당시 상주와 영동, 무주, 거창, 성주, 선산 등지로 연결되는 길목에서 크고 작은 전투가 빈번하게 일어났는데, 부상고개와 추풍령, 석현고개, 우두령, 김천역, 지례, 공자동에서의 전투가 대표적이다. 또 경상도 일원의 의병들이 앞 다투어 개령의 왜군 사령부를 공격하기 위해 개령으로 진격하는 등 임진왜란 당시 개령 동부리는 전국적으로 이목이 집중된 격전지이자 참상지로 이름을 알렸으니, 역사의 질곡이 자못 깊고도 깊다.
[정보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