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23007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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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泉 葛項寺址 石塔記 |
이칭/별칭 | 갈항사 석탑기,갈항사지 석탑기 |
분야 | 문화유산/기록 유산,종교/불교 |
유형 | 유물/유물(일반) |
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남면 오봉리 |
시대 | 고대/남북국시대/통일신라 |
집필자 | 김창겸 |
제작 시기/일시 | 785~798년 - 김천 갈항사지 동서 삼층석탑에 석탑기 작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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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토|발굴 시기/일시 | 1914년 - 김천 갈항사지 석탑기 알려짐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1916년 2월 12일 - 김천 갈항사지 동·서 삼층석탑 도굴 |
이전 시기/일시 | 1916년 6월 - 김천 갈항사지 동·서 삼층석탑 경상북도 김천시에서 서울특별시 종로구 경복궁 내로 이전 |
문화재 지정 일시 | 1962년 12월 20일 - 김천 갈항사지 동·서 삼층석탑 국보 제99호 지정 |
이전 시기/일시 | 2005년 - 김천 갈항사지 동·서 삼층석탑 경복궁에서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전 |
현 소장처 | 국립중앙박물관 - 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로 137[용산동6가 168-6] |
출토|발견지 | 갈항사지 - 경상북도 김천시 남면 오봉리 |
성격 | 유물 |
양식(문양) | 해서체 |
재질 | 화강암 |
크기(높이) | 자경 6㎝ |
관리자 | 국립중앙박물관 |
[정의]
경상북도 김천시 남면 오봉리에 있었던 통일신라시대 갈항사지 동서 삼층석탑 중 동탑에 새겨져 있는 명문.
[개설]
경상북도 김천시 남면 오봉리 소재 갈항사 터에 동·서로 세워져 있던 두 개의 석탑이 1916년 2월 도굴범들에 의해 파손되고 일본으로 반출될 위기에 처하자 1916년 6월 당시 조선총독부 박물관이 있었던 경복궁[현 서울시 종로구 세종로 1]으로 옮겨져 경복궁 내 야외 정원에 전시되었다가, 2005년 국립중앙박물관의 석조물 정원 야외 전시실에 이건되었다. 석탑기는 동탑의 기단부에 새겨져 있는데 탑이 세워진 해와 발원한 인물에 대한 글이 명기되어 있다.
[형태]
김천 갈항사지 석탑기는 1914년에 알려졌다. 석탑기는 4줄로 새겨져 있으며, 글씨 모양은 해서체이고, 글씨 크기는 자경 6㎝이다. 판독문과 해석문은 다음과 같다.
二塔天寶十七年戊戌中立在之[두 탑은 천보(天寶) 17년 무술년에 세워졌다.]
娚姉妹三人業以成在之[오라비와 자매 세 사람의 업(業)으로 이루었다.]
娚者零妙寺言寂法師在旀[오라비는 영묘사(零妙寺)의 언적법사(言寂法師)이었으며,]
姉者照文皇太后君妳在旀[큰누이는 조문황태후(照文皇太后)로 왕의 어머니였으며,]
妹者敬信太王妳在也[작은 누이는 경신태왕(敬信太王)의 이모였다.]
김천 갈항사지 석탑기의 내용에 의하면, 758년(천보 17, 경덕왕 17)에 오라비인 영묘사 언적법사와 큰누이인 조문황태후와 작은 누이 등 3인이 석탑을 세웠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조문황태후’는 원성왕의 어머니인 계오부인(繼烏夫人) 박씨가 죽은 뒤에 받은 추존 시호이므로, 칭호로 볼 때 석탑기가 새겨진 것은 석탑이 세워진 해인 758년보다 약 30년 뒤인 김경신이 왕으로 즉위하여 어머니를 조문황태후로 추봉한 뒤였음을 알 수 있다. 즉 경덕왕 대에 동·서 삼층석탑을 세우고 원성왕 대(785~798)에 석탑기를 새겼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갈항사는 승려 승전(勝詮)이 692년(효소왕 1) 창건한 이후 2차례 정도 중창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첫 번째는 석탑을 건립한 758년, 두 번째는 석탑기를 새긴 원성왕 대에 중창되었을 것이다.
[특징]
김천 갈항사지 석탑기는 대부분 해서체이지만, ‘묘(妙)’·‘적(寂)’·‘법(法)’·‘사(師)’·‘경(敬)’ 자 등 행서체도 섞여 있고, 서체가 낭공대사비와 닮았으며 서품이 높다는 평가다. 이 명문은 북위풍의 해서처럼 ‘십(十)’과 ‘중(中)’자의 세로획이 유난히 짧은 김생(金生) 글씨의 특징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고 하면서 김천 수도암비와 더불어 신라시대 명필 김생이 이른 시기에 쓴 글씨라는 주장이 제기되었으나, 진위에 대해서는 찬반 논쟁이 있다.
[의의와 평가]
김천 갈항사지 석탑기는 신라의 금석학과 역사학은 물론 명문 내용에 이두가 사용되었기 때문에 어문학사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특히 김천 지역이 신라 제38대 원성왕의 즉위와 밀접한 연관성이 있음을 알려 주는 소중한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