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20187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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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柳疇睦 |
영어음역 | Yu Jumok |
이칭/별칭 | 숙빈(叔斌),계당(溪堂),류주목(柳疇睦)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개령면 서부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송기동 |
출생 | 181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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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 1872년 |
출생지 | 경상북도 상주시 중동면 우물리 1102 |
묘소|단소 | 경상북도 김천시 개령면 서부리 |
성격 | 유학자 |
성별 | 남 |
본관 | 풍산(豊山) |
[정의]
조선 후기의 유학자.
[가계]
본관은 풍산. 자는 숙빈(叔斌), 호는 계당(溪堂).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의 9세손으로, 할아버지는 용양위부호군 유심춘(柳尋春)이며, 아버지는 좌의정 유후조(柳厚祚), 어머니는 연안 이씨로 부사 이재연(李載延)의 딸이다.
[활동 사항]
유주목(柳疇睦)은 1813년(순조 13) 상주시 중동면 우물리에서 태어났다. 전통적인 가학을 전수하여 젊은 시절에 이미 학행(學行)을 갖추어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다. 일찍이 과거에 뜻을 접고 향리에서 초가집을 짓고 학문과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다. 1854년(철종 5) 경상도관찰사 신석우(申錫愚)가 고기와 술을 보내오자 되돌려 보냈다. 1866년(고종 3)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정윤우(鄭允愚)의 추천으로 의병장이 되었으나 적이 물러나 곧바로 의진을 파하였다. 1867년 고종이 동몽교관, 장악원주부, 공충도도사(公忠道都事)를 연이어 제수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868년에는 계정(溪亭)에 선비들을 모아 『소학(小學)』과 「백록동규(白鹿洞規)」를 강하고 상읍례(相揖禮)를 행해 사풍을 크게 진작시켰다. 유도수를 비롯한 320여 명에 달하는 제자를 배출하였다.
[학문과 저술]
유주목은 조선 후기 영남의 퇴계 학통에 속하는 유학자로 성리학·예학·역사학·보학(譜學)에 두루 통달했으며, 문장과 서법에도 상당한 조예가 있었다. 『전례유집(全禮類輯)』은 사례(四禮)·오례(五禮)·사상례(士相禮)·거가잡의(居家雜儀)를 두루 참고해 완성한 예학의 집대성이다. 『사칠논변(四七論辨)』은 성리학에 대한 선유들의 견해를 취합하여 편찬한 것이다. 『조야약전(朝野約全)』은 당쟁에 대한 글들을 시대 순으로 정리한 것이다. 『해동보(海東譜)』는 씨족의 계보를 밝힌 40책 분량의 역작이다. 이 밖에 문집으로 『계당집(溪堂集)』이 있다.
[묘소]
1872년(고종 9) 세상을 떠나자 부친인 유후조의 묘와 이웃하고 있는 김천시 개령면 서부리 감문산에 묻혔다. 묘소가 있는 감문산은 예부터 호랑이가 누워 있는 와호형(臥虎形)의 명당 터로 전해진다.
[상훈과 추모]
1928년 8월에 증손이 『계당집(溪堂集)』[16권 8책 100질]을 목판으로 간행하였다. 유주목이 출생한 수암 종택은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70호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