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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201863
한자 崔昌洛
영어음역 Choe Changrak
이칭/별칭 범구(範九),남애(南涯)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조마면 신안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임삼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1832년연표보기
몰년 1886년연표보기
출생지 경상북도 김천시 조마면 신안리 지도보기
묘소|단소 경상북도 김천시 조마면 신안리
정자 경상북도 김천시 조마면 신안리 1098 남애정
성격 선비
성별
본관 화순(和順)

[정의]

조선 후기 김천 출신의 유학자.

[가계]

본관은 화순(和順). 자는 범구(範九), 호는 남애(南涯). 증조할아버지는 최하대이고, 아버지는 최성수이다. 아들로 김천의 대표적 독립운동가 최학길(崔鶴吉)을 두었다.

[활동 사항]

최창락(崔昌洛)[1832~1886]은 지금의 김천시 조마면 신안리에서 태어났다. 1880년(고종 17) 12월 김천시 안서동[현 조마면 신안리]에서 동민들과 함께 마을의 규범을 담은 12개조로 구성된 안서동약(安棲洞約)을 만들었다.

[학문과 저술]

최창락은 어려서부터 배우기를 좋아하고 명리(名利)에 뜻을 두지 않았다. 서애(西厓) 학통 계열인 계당(溪堂) 류주목(柳疇睦)의 문하에서 의리학을 배웠고, 성재(性齋) 허전(許傳)의 문하에서 경학을 공부하였다. 성재가 공의 호를 내리고 「남애서실기」를 써 주었다. 장복추·임오기 등과 도의로 사귀며 학문을 강론하여 사림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김산군수 윤창섭은 최창락에 대해 “경전을 깊이 연구하여 조예가 깊고, 자연을 사랑하여 스스로 드러내기를 꺼리는 선비”라고 평가하였다.

최창락은 벼슬길에 나가는 것을 끝내 거절하고, 후진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묘소]

묘소는 김천시 조마면 신안리 뒷산 기산(箕山)에 있으며, 묘갈문은 장복추가 지었다.

[상훈과 추모]

훗날 문생(門生)들이 『남애문집』을 간행하였다. 『남애문집』은 전 4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제3권 「용학망의」[심기택 서], 「소학췌언」[심기택 서]은 심혈을 기울인 역저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문생과 사림이 1913년 계를 조직하여 김천시 조마면 신안리 1098번지남애정(南涯亭)을 세우고, 정자의 앞뜰에 강사비(講思碑)를 세웠다. 강사비의 비문은 정종호가 지었다.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1.08.03 2011년 한자 재검토 작업 「용학망의」[심기택 서], 「소학췌언」[심기택 서]은 심혈을 기울인 역저로 알려져 있다 ->「용학망의」[심기택 서], 「소학췌언」[심기택 서]는 심혈을 기울인 글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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