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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200965
한자 金丹冶
영어음역 Gim Danya
이칭/별칭 추성(秋星),달연(達淵),주(柱),김태연(金泰淵)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이근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1901년 1월 16일연표보기
수학 1908년 4월연표보기
수학 1909년 4월연표보기
수학 1910년 4월연표보기
수학 1914년연표보기
활동 1915년연표보기
수학 1917년 1월연표보기
수학 1917년 9월연표보기
활동 1919년연표보기
수학 1922년연표보기
활동 1923년연표보기
활동 1923년연표보기
활동 1925년 1월 21일연표보기
활동 1925년 4월 17일연표보기
활동 1925년 4월 18일연표보기
활동 1930년 1월연표보기
활동 1937년 11월연표보기
몰년 1938년 2월 13일연표보기
추모 2005년연표보기
출생지 경상북도 김천시 개령면 동부리 69번지
성격 사회주의 운동가|독립운동가
성별
본관 김녕(金寧)
대표 경력 화요회 운영

[정의]

일제 강점기 김천 출신의 사회주의 운동가·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김단야(金丹冶)는 1901년 1월 16일 지금의 경상북도 김천시 개령면 동부리 69번지에서 김종원의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김태연이다. 추성(秋星), 달연(達淵), 주(柱) 등의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1908년 4월 개진학교에 입학했다가 1909년 4월 진명학교(進明學敎)로 옮겼고, 1910년 4월에는 영진학교(永眞學敎)에 들어가 1914년에 졸업하였다. 1915년 대구 계성학교로 편입, 3학년 때 동맹 휴학으로 퇴학당했다. 1917년 1월 일본 동경(東京)으로 건너가 세이소쿠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에서 6개월 동안 공부하였다. 그리고 그 해 9월 서울의 배재학교에 입학한 후 학생 비밀 결사에 가담했다.

1919년 3·1운동 때 개령에서 만세 시위운동을 하다가 잡혀 태형 90대의 처벌을 받았다. 그 해 8월 김교훈 등과 지하 비밀 신문 『신한별보(新韓別報)』를 배포하다 발각되기도 했으며, 조선에 파견된 만주군정서 요원에게 모병한 네 사람과 모금한 군자금 813원(圓)을 인도하기도 했다.

1922년 소련 동방노력자공산대학과 레닌그라드연구소에서 공산주의를 공부하고, 1923년에는 홍명희가 주도하는 사회주의사상연구회[1924년 화요회로 개편]를 운영하였다. 같은 해 김단야는 동료 세 명과 함께 의주경찰서 관내의 영산경찰관주재소를 습격하고 도피했다. 1925년 1월 21일 『조선일보』에 「레닌 회견 인상기」를 연재하여 세상의 주목을 받았다.

같은 해 4월 17일 화요회와 북풍회 그리고 노동당이 모여서 조선공산당[제1차]을 조직하고, 4월 18일에는 박헌영의 집에서 고려공산당청년회를 조직하였다. 당시 박헌영은 서기부장, 조봉암은 국제부장, 김단야는 연락부장으로 직책을 나누어 맡는 동시에 해외부를 두어 조봉암은 만주, 김단야는 상해, 김정규는 일본을 맡았다. 1926년 제2차 조선공산당 재건 조직 때 김단야권오설 등과 소련에서 막대한 자금과 격문을 가져 오다가 탄로 나서 구금되었는데, 이것으로 주요 공산주의자로 지목되어 항상 경찰의 감시가 따랐다.

1928년 김단야는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출신의 여류 공산주의자 고명자와 서울에서 동거 생활을 했다. 1930년 1월 아현동 고명자의 집에서 공산주의자 회합이 있었는데, 경찰에 탐지되어 23명이 체포되었으나 김단야는 탈출하여 소련으로 망명했다. 1937년 11월 한국인 사회주의자가 김단야를 일본 제국주의 밀정이라고 밀고하여 소련의 비밀경찰에 체포되었고, 다음해인 1938년 2월 13일 반혁명 폭동과 반혁명 테러 활동을 목적으로 결성된 단체의 지도자로 판결 받고 사형을 당했다.

[상훈과 추모]

2005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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