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200937 |
---|---|
한자 | 片甫彦 |
영어음역 | Pyeon Boeon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손경희 |
출생 | 1866년 |
---|---|
활동 | 1894년 8월 |
몰년 | 1901년 |
출생지 | 경상북도 김천시 어모면 다남리 |
성격 | 동학 농민군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금산 도집강 |
[정의]
개항기 김천 출신의 동학 농민군.
[활동 사항]
편보언(片甫彦)은 1866년 지금의 경상북도 김천시 어모면 다남리 참나무골에서 무관 집안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절강(浙江)이다. 절강 편씨는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들어온 명나라 유격장 편갈송(片碣頌)의 후손으로 대대로 무과 벼슬을 했다. 편보언의 할아버지는 1854년(철종 5) 무과에 급제했으며, 50마지기의 토지를 소유했다. 할아버지의 재산을 이어 받은 편보언의 아버지는 상당한 지주였던 까닭에 아들에게 출셋길을 열어 주기 위해 글을 가르쳤다. 편보언은 살짝 곰보이기는 했으나 장성하면서 “키 크고 글 잘 한다.”는 칭송을 받았다. 아버지한테서 50마지기의 재산을 물려받았기에 중농에 속했다.
참나무골에는 어느 때부터인지 동학이 퍼지기 시작해서 온 마을이 동학촌이 되었다. 보은집회가 해산된 뒤, 최시형은 경상도로 가서 칠곡과 인동을 거쳐 참나무골 편보언의 집에 숨어 있었다. 이때 서병학이 찾아와 “교도를 모아 정부를 공격하고 국가를 혁신하자.”고 진언하자, 편보언은 동학 포교에 50마지기의 재산을 모두 투자했다.
1894년 8월 무렵, 편보언은 금산 장터에 도소를 차려 놓고 도집강으로 군정을 실시했는데, 금산의 총지휘자로 군림하면서 도소에 몰려드는 사람의 이름을 적고, 교주 최시형의 도장이 찍힌 ‘예지(禮紙)’라는 증명서를 발급하는 한편 접주·접사·성찰 등의 분임을 임명했다. 특히 성찰을 최하층민인 ‘상놈’으로 임명해 폐정을 개혁하는 일에 착수했다.
성찰은 잘못된 일을 바로잡는 책임자로서, 무장 호위대를 거느리고 각 마을로 나가 일을 처리했다. 이때 종들이 속속 모여들었는데, 원래 상전은 돈을 받고 종을 풀어 주는 것이 관례였으나 성찰이 마을로 들어가면 아무 대가 없이 종들을 속량(贖良)[몸값을 받고 노비의 신분을 풀어 주어서 양민이 되게 하던 일]할 수밖에 없었다. 속량을 거부하면 성찰에게 보고되어 커다란 피해를 감수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도집강 편보언은 폐정을 뜯어 고쳐 가면서 한편으론 막대한 군량미와 재물도 거두어 들였다. 도집강 아래에서 접주들은 깃발을 세운 채 말을 타고 마을로 들어갈 때나 나올 때는 포를 놓아 이를 알렸다.
그 해 9월 말 북접 교단으로부터 편보언에게 기포령(起包令)이 내려지자 편보언은 각 접주들에게 기군령(起軍令)을 내렸다. 집결 장소인 감천의 모래밭에는 수많은 농민군으로 발 들여 놓을 틈이 없었다. 당시 북접 교단에서는 이웃 고을을 점령해 농민군 통치 조직을 확대하고 낙동강 가에 있는 해평의 일본 병참부를 공격한 후 여세를 몰아 공주 쪽으로 진출하려 했다. 금산의 농민군은 상주와 선산의 농민군 그리고 예천의 패잔 농민군과 연합해 맨 먼저 선산의 관아를 공격했다. 이들은 큰 저항을 받지 않고 관아를 접수했다.
농민군이 너무나 쉽게 선산을 점령한 뒤 승리감에 빠져 있을 때 일본군이 새벽을 틈타 기습을 감행해 왔다. 이에 농민군은 혼란에 빠졌다. 일본군의 총에 맞아 몇 백 명이 쓰러졌고, 성을 넘어 도망치려다가 떨어져 죽은 자도 태반이었다. 편보언을 비롯한 금산의 농민군 지도자들은 다시 금산 장터로 돌아와 재기를 도모했으나 그때까지 출진을 하지 않았던 대구감영의 남영병이 농민군 토벌에 나섰다. 남영병이 금산 장터에 들이닥친 것은 10월 5일로, 편보언은 도망을 쳤지만 부하들은 제대로 저항도 못하고 흩어졌으며, 각지의 접주들은 계속 잡혀 와서 모진 매를 맞으며 죽어 갔다고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