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2009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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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呂彩龍 |
영어음역 | Yeo Chaeryong |
이칭/별칭 | 견재,이은(二隱)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손경희 |
출생 | 1866년 12월 1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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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 1921년 |
활동 | 1923년 |
활동 | 1924년 |
활동 | 1924년 2월 |
몰년 | 1936년 5월 21일 |
추모 | 1956년 |
추모 | 1956년 |
추모 | 1990년 |
출생지 | 경상북도 김천군 구성면 금평동 |
묘소 | 경상북도 김천시 구성면 금평리 |
성격 | 의사(義士) |
성별 | 남 |
[정의]
개항기 김천 출신의 의사(義士).
[가계]
본관은 성산(星山). 자는 견재, 호는 이은(二隱)이다. 성산 여씨 여대로(呂大老)의 후예로, 아버지는 여석희이다.
[활동 사항]
여채룡(呂彩龍)은 1866년 경상북도 김천군 구성면 금평동[현 경상북도 김천시 구성면 금평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바르고 지기가 곧았으며, 여진룡(呂震龍)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익혀 문장이 좋았다고 전한다. 을사보호조약과 경술국치를 겪은 뒤로 거실에 ‘독한정(獨韓亭)’이란 당호를 걸고는 일제에 항거할 뜻을 드러냈다. 1921년 여채룡은 「일왕10죄론」을 지은 데 이어 “일본이 저지른 죄는 지하의 귀신도 그냥 두지 않을 것이니, 더 이상 불의를 저지르지 말라. 돌아가지 않으면 다시 거병하여 주륙하겠다.”는 내용의 서한을 총독에게 보냈다.
1923년 여채룡은 “오적을 없애고 합심해 일본놈을 토멸하자.”는 광고문과 “임진년에는 이 강토를 짓밟더니 이번에는 보호라는 미명 아래 나라를 강탈하니 원수를 갚기 전에는 상복을 벗을 수 없다.”는 내용의 「애국가(哀國歌)」를 썼다. 또한 “일본 놈을 격멸할 때는 왔다. 공력 합심하여 일어서자.”는 내용의 「포고문(布告文)」을 전국 향교를 통해 유림에 우송했다가 1924년 2월 상주경찰서에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여채룡은 대구지방법원 김천지청에서 재판을 받을 때 재판장에게 “나는 대한 신민으로 어찌 너희들의 금수 같은 왕을 섬기겠는가. 너희 왕의 죄는 천고에 없는 무도한 죄다. 만 번 죽어도 아까울 게 없다. 우리나라를 내어 놓지 않으면 내가 죽기 전에 꼭히 전 유림과 합심해서 거병하여 내 나라를 찾을 것이다.”라고 하는 등 조선 혼의 기백을 잃지 않으므로 법정이 숙연해졌다고 한다.
이후 여채룡은 10월형을 선고 받고 복역한 뒤 풀려났으나 1928년부터 일제 치하의 납세를 거부하며, 전답에서 나오는 곡물마저 먹지 않으려고 홀로 송림산에 들어가 움막을 짓고 초근목피로 연명하였다. 그리고 ‘일편조선(一片朝鮮)’이란 글자를 바위에 새기고 「채미가」와 같은 우국 시를 지어 울분을 토로하며 매일 아침 대궐을 향해 크게 통곡하며 국권 회복을 하늘에 빌다가 9년 만에 영양실조로 죽었다.
[묘소]
묘소는 경상북도 김천시 구성면 금평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전국 유림에서 조선의 백이숙제(伯夷叔齊)라 칭송했으며, 사후 유림장으로 장례를 치르고 ‘조선 의사’라 추숭했다. 1956년 성균관에서 절의를 포상했으며, 대통령 포상도 내려졌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유림에서 김천시 구성면 금평리 마을 앞 도로 변에 여채룡선생 유허비를 건립했는데, 비문은 송홍래가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