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2009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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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來英 |
영어음역 | Bak Naeyeong |
이칭/별칭 | 박영조(朴永祚)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증산면 유성리 351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송호상 |
출생 | 1873년 2월 2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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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 1915년 |
활동 | 1915년 |
활동 | 1918년 |
활동 | 1919년 3월 12일 |
활동 | 1936년 11월 |
몰년 | 1960년 10월 10일 |
추모 | 1995년 |
출생지 | 경상북도 김천시 증산면 유성리 351 |
거주|이주지 | 경상북도 김천|경상북도 경주|대구 등 |
학교|수학지 | 평양 |
활동지 | 경상북도 김천|경상북도 경주|대구 등 |
묘소 | 대전광역시 유성구 갑동 산23-1[계룡로 1558] 대전 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
성격 | 독립운동가|목회자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경주 지역 3·1 운동 참여|대구 자치 교회 선언|대구기독교청년회 활동 |
[정의]
일제 강점기 김천 출신의 독립운동가·목회자.
[활동 사항]
박내영(朴來英)은 1873년 2월 25일 지금의 경상북도 김천시 증산면 유성리 351번지에서 태어났다. 박영조(朴永祚)로도 불렸다. 1915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김천 황금동교회에서 목회를 하다가 1918년 경주읍에 있는 도동리교회[현 경주제일교회] 목사로 부임하여 활동하였다. 1919년 3월 11일 서울에서 일어난 만세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되는 가운데, 경산 사월교회 목사 김기원이 박내영을 찾아와 대구 지역의 만세 시위 상황을 전하면서 경주 지역도 만세 시위에 동참할 것을 권유하였다. 이에 박영조는 당시 자리를 함께했던 교회 영수(領首) 박문홍, 교인 김학봉·윤기호 등과 3월 13일 경주읍 장날에 만세 시위를 하기로 모의하였다.
3월 12일 밤 박내영은 박문홍의 집에서 태극기를 만들어 시위 당일 새벽 동지에게 배포하던 중 미리 정보를 입수한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박문홍 등 15명과 함께 체포, 구금되었다. 이로 인해 경주읍 장날의 시위는 무산되었으나 체포되지 않았던 김학봉과 최성렬 등 청년들과 박내영의 체포에 반발하던 교인들을 중심으로 3월 15일 경주읍의 작은 장날을 기해 만세 시위가 전개되었다.
이후 박내영은 박문홍과 함께 대구지방법원 경주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을 선고 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박내영은 대구 남산교회 목사로 초대받아 활동하였다. 아울러 대구기독교청년회의 종교부장으로 활동하다 1923년 대구 남성정교회 이만집 목사를 중심으로 자치 교회가 설립되자 이에 동참하였다. 자치 교회 선언은 당시 선교사 중심으로 돌아가는 교회와 대구 계성학교 운영에 대한 반발로 표출된 것이었다.
자치 교회 선언을 주도한 이만집은 남성정교회 목사로서 대구기독교청년회 회장을 맡고 있었다. 이러한 이만집의 행동에 박영조도 동참했던 것이다. 이른바 자치 교회 선언에 대해 선교사들이 장악하고 있던 경북노회는 1923년 3월 노회에서 이만집과 박내영을 정직 처분하였다. 정직 처분 이후의 복권에 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아서 알 수 없는 상황이다.
박내영은 경상도 지역의 개신교 조직인 경상노회에서 경북노회가 분립될 때 초대 경북노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경북노회 내의 교회가 성장하는 가운데 1936년 11월 경주·영천 지역을 중심으로 한 경동노회가 분립되었고, 박내영은 초대 경동노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경상북도 흥해읍교회, 고령군 고령읍교회·안림교회, 경산읍 하양교회의 목사로 시무했으며, 은퇴 후엔 순회 목사로 개신교 전도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묘소]
1960년 6월 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상훈과 추모]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