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200892 |
---|---|
한자 | 金南洙 |
영어음역 | Gim Namsu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아포읍 제석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송호상 |
출생 | 1900년 5월 18일 |
---|---|
활동 | 1921년 2월 16일 |
몰년 | 1971년 12월 28일 |
추모 | 1982년 |
추모 | 1990년 |
출생지 | 경상북도 금릉군 아포면 제석리 274[현 김천시 아포면 제석리] |
거주|이주지 | 경상북도 금릉 |
활동지 | 경상북도 금릉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군자금 모금 |
[정의]
일제 강점기 김천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김남수(金南洙)는 1900년 5월 18일 경상북도 금릉군 아포면 제석리 274번지[현 김천시 아포면 제석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음력 8월 중순경 김남수는 김천군 아포면 인리(仁里)에 있는 음식점 백남태(白南台)의 방에서 같은 지역 민족 운동가였던 김교훈이 구미 선산 지역을 중심으로 만세 시위를 계획하면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고 있음을 알았다. 김남수는 자신의 재당숙 김성숙으로부터 1,400원이라는 거금을 얻어, 김교훈에게 제공하였다.
이후 김남수는 김교훈과 더불어 최상문(崔相文)과 만나, 엄용호(嚴龍鎬)로부터 입수한 『혁신신보(革新申報)』와 『신한별보(新韓別報)』 기사를 발췌한 후 이를 등사하여 인근 지역에 배포함으로써 독립 사상을 고취하는 데 힘썼다. 이들 신문들은 신민회 회원으로 독립 운동에 앞장섰던 김태연(金泰淵)[김단야로 알려져 있음]이 『조선일보』 기자로 활동한 경험을 살려 지하 신문으로 발간한 것으로서, 김남수는 김교훈에게 자금을 제공하고 이들 신문의 발췌 기사를 인쇄하게 하였다. 또한 『신한별보』를 휴대하고 김천군 개령면 동부리에 있는 배점석(裵點石)에게 가서, 그 신문을 보여 주고 독립 운동에 가담할 것을 권유한 다음 독립 운동 자금으로 50원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김남수는 이러한 군자금 모금 활동과 독립 사상 고취 혐의로 체포되어 1921년 2월 16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0월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상훈과 추모]
1982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