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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200883
한자 許蔿
영어음역 Heo Wi
이칭/별칭 왕산(旺山)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송호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1855년 4월 2일연표보기
활동 1895년연표보기
활동 1907년연표보기
몰년 1908년 10월 21일연표보기
활동 1908년 1월연표보기
활동 1908년 6월 11일연표보기
추모 1962년연표보기
특기 사항 1966년 11월 26일연표보기
추모 2009년연표보기
출생지 경상북도 구미시 임은동
거주|이주지 경상북도 구미
활동지 경상북도 김천 등
성격 항일 의병장|유학자
성별
대표 경력 13도창의대진소 군사장

[정의]

개항기 김천 지역에서 활동한 항일 의병장.

[활동 사항]

허위(許蔿)의 본관은 김해(金海), 호는 왕산(旺山)이다. 1855년(철종 6) 4월 2일 경상북도 구미시 임은동의 선비 가문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맏형 허훈에게 학문을 배웠다. 허훈성호 이익의 학문을 이은 학자였다. 허위 형제는 1895년 민비의 시해와 단발령 소식을 듣고 각각 의병에 가담했다.

허위는 상주와 김산[현 김천], 충청도의 유생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당시 허위는 김산의병 부대의 참모장이 되어 “나라에 환란이 발생하였으니 모든 사람들이 몽둥이와 호미를 들고 일어나면 적들도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할 것.”이라는 격문을 발표하였다. 김산의병 부대는 김천 장날 읍으로 들어가 장병을 모집하고 금릉의 무기고를 습격했으며, 성주와 지례에 진을 치고 대구를 공격하려 했으나 관군의 공격으로 패퇴하였다.

의병을 해산한 후 진보로 들어가 학문에 전념하던 허위는 1899년 45세가 되던 해 신기선의 추천을 받아 관직에 나아갔다. 이후 허위는 원구단참봉을 시작으로 중추원의관, 평리원수반판사, 평리원재판장과 의정부참찬 등을 역임하였다.

1904년 러일전쟁을 일으킨 일제가 한일 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하자 허위는 이러한 현실에 저항하여 이상천·박규병 등과 배일 통문을 작성했는데, 이 통문에서 일본의 침략을 저지하기 위해서 의병을 조직, 거사할 것을 촉구하였다. 또한 일본이 러일전쟁을 일으키면서 내세운 한국의 독립과 영토 보장이란 명분이 거짓임을 격문을 통해 일깨웠다. 허위는 이러한 활동으로 인해 최익현과 더불어 일본 헌병대에 4개월간 구금되기도 하였다.

구금에서 풀린 허위는 관직을 사직하고 지례군 삼도봉[현 김천시 부항면 대야리]에 은거하였다. 그러나 1905년 이른바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허위는 다시 의병을 일으켜 항쟁하기로 하고 전라도와 경기도, 경상도 일원을 돌면서 거의를 준비하였다. 그동안 헤이그밀사사건을 계기로 고종이 강제 퇴위되었고, 군대도 해산되었다. 해산 군인들이 의병에 참여하면서 의병의 전투력이 향상된 가운데 허위는 1907년 경기도 연천과 적성 등지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이후 허위는 강원도의 이인영 부대 등과 협의하여 13도창의대진소를 결성하고 전국의 의병들을 경기도 양주에 모이도록 하였다. 여기서 관동창의대장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경기도와 황해도를 관할하는 진동창의대장이 되었다가, 1908년 1월 조직을 정비하면서 군사장이 되었다.

13도창의대진소의 연합 의병 부대는 허위가 이끄는 부대를 선봉으로 하여 서울 탈환에 나섰다. 서울을 공격하면서 서울 소재 각국 공사관에게 통문을 보내 일제의 불법적인 침략을 규탄하고 의병 부대를 국제 공법상의 전투 단체로 인정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후 허위가 이끄는 부대는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진격하였으나 후원 부대의 지원이 단절되고 탄환 등이 부족해지면서 일본군에게 밀려 퇴진하게 되었다. 1966년 11월 26일 정부에서는 이 사건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긴다는 의미로 동대문에서 청량리까지의 도로를 허위의 호를 따서 왕산로라 하였다.

이후 임진강 유역을 중심으로 의병 활동을 전개하던 허위는 1908년 6월 11일 경기도 양평군 유동(柳洞)이란 산중 마을에서 일본군 헌병에게 붙잡혀 1908년 10월 21일 서대문감옥에서 51세로 순국하였다.

허위와 더불어 김산의병에 참여했던 숙형(叔兄) 허겸은 을사조약에 반대하고 을사오적 암살 사건에 가담했다가 투옥된 후 풀려나 1912년 서간도로 갔다. 이후 허겸은 김동삼과 더불어 활동하면서 부민단의 초대 단장이 되었으며, 1940년까지 독립 운동을 전개하였다. 허위의 장남 허학(許壆)[일명 허형]은 의병 출신들이 조직한 독립의군부에 참여했는데, 여기에는 허위의 사위 및 옛 부하들도 함께 참여하였다. 또한 처형된 허위의 시신을 수습했던 제자 박상진은 무장 독립 투쟁 단체였던 대한광복회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상훈과 추모]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2009년 구미시 임은동에 왕산허위선생기념관이 개관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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