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20087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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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泗溟大師 |
영어음역 | National Master Doseon |
이칭/별칭 | 이환(離幻),사명당(四溟堂),송운(松雲),유정(惟政),임응규,종봉(鍾峯),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 |
분야 | 종교/불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종교인 |
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손경희 |
출생 | 154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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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가|서품 | 1559년 |
활동 | 1562년 |
몰년 | 1610년 |
출생지 | 경상남도 밀양시 |
활동지 | 경상북도 김천시 대항면 운수리 216 |
추모 | 경상남도 밀양시 단장면 구천리 31-2 |
추모 | 평안북도 향산군 향암리 묘향산 |
성격 | 승려|승병장|의병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선교양종판사 |
[정의]
조선 후기 김천 직지사로 출가한 고승(高僧)이자 의병장.
[가계]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이환(離幻), 호는 사명당(四溟堂)·송운(松雲), 속명은 임응규(任應奎), 별호는 종봉(鍾峯). 아버지는 임수성(任守成)이다.
[활동 사항]
사명대사(泗溟大師)[1544~1610]는 직지사에 6년간 머물렀으며 주지를 지냈다. 1575년(선조 8) 왕의 중망(衆望)에 의하여 선종의 수사찰(首寺刹)인 봉은사의 주지로 천거되었으나 사양하였다. 이후 묘향산 보현사(普賢寺)의 휴정(休靜)을 찾아가서 선리(禪理)를 참구하였다. 이듬해 해인사에 잠시 머물렀고, 다시 휴정의 곁에서 도를 닦다가 1578년부터 팔공산·금강산·청량산·태백산 등을 다니면서 선을 닦았다. 1586년(선조 19) 옥천산 상동암(上東庵)에서 오도(悟道)하였다. 그 뒤 오대산 영감사(靈鑑寺)에 머물렀다.
1589년(선조 22) 정여립의 역모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모함을 입어 강릉부의 옥에 갇혔으나, 강릉의 유생들이 무죄를 항소하여 석방되었다. 이듬해 금강산으로 들어가서 수도하던 중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당시 유점사(楡岾寺)에 있으면서 인근 아홉 고을의 백성들을 구출하였다. 이때 조정의 근왕문(勤王文)과 스승 휴정의 격문을 받고 승병을 모아 순안으로 가서 휴정과 합류하였다. 그곳에서 의승도대장(義僧都大將)이 되어 승병 2,000명을 이끌고 평양성 탈환의 전초 구실을 담당하였다.
1593년(선조 26) 1월 명나라 구원군이 주축이 되었던 평양성 탈환의 혈전에 참가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고, 그해 3월 서울 근교의 삼각산 노원평(蘆原坪) 및 우관동 전투에서도 큰 공을 세웠다. 선조는 사명대사의 전공을 포장하여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를 제수하였다. 그 뒤 전후 네 차례에 걸쳐 적진에 들어가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와 회담을 하였다.
제1차 회담은 1594년 4월 13~16일 서생포 일본 본진에서 열렸는데 강화 5조약으로 제시된 ①천자와 결혼할 것 ②조선 4도를 일본에 할양할 것 ③전과 같이 교린할 것 ④왕자 한 명을 일본에 보내 영주하게 할 것 ⑤조선의 대신 및 대관을 일본에 볼모로 보낼 것 등을 하나하나 논리적인 담판으로 척파하였다. 제2차 회담은 1594년 7월 12~16일, 제3차 회담은 1594년 12월 23일, 제4차 회담은 1597년 3월 18일 열렸는데, 이때도 대표로 나아가 강화 5조약의 모순을 지적하여 적들의 죄상을 낱낱이 척파하였다.
특히 제2차 적진 담판을 마치고 돌아와 선조에게 전말과 적정을 알리는 ‘토적보민사소(討賊保民事疏)’를 올렸다. 문장이 웅려하고 논조가 정연한 토적보민사소는 보민토적(保民討賊)의 이론을 전개함은 물론, 실천 방도를 제시한 상소이다. 그 내용은 첫째 모든 국민을 총동원하여 빈틈없는 작전으로 적을 격퇴해야 하고, 둘째 교린하여 적을 돌려보낸 뒤 백성을 안위하게 하고 농업을 장려하는 동시에 민력(民力)을 무장하여야 하며 전쟁에 필요한 군수 무기를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1595년(선조 28)에는 장편의 을미상소를 올렸는데, 전쟁에 대비하여 역사적 안목과 현실을 적절히 파악한 면을 보여 준다. 즉 민력을 기르기 위하여 목민관을 가려 뽑아 백성을 괴롭히는 탐관오리를 소탕할 것, 일시적인 강화로 국가 백년의 대계를 망각하지 말고 국세 회복에 만반의 방어책을 세울 것, 인물 본위로 등용하여 천한 사람일지라고 나라에 쓸모 있는 역량을 갖춘 사람이면 적소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할 것, 국가 기강을 쇄신하며 문란한 기풍을 뿌리 뽑고 민력을 북돋우어 군정(軍政) 확립의 본을 보일 것, 소[農牛]를 매호하여 중농 정책을 확립할 것, 산성을 수축하여 산성마다 군량·마초·방어 무기를 준비할 것, 승려도 일반 백성과 동일한 처우를 하여 국가 수비의 일익을 담당하게 할 것 등이다.
국방에도 깊은 관심을 보이며 산성 수축에 힘을 다하였다. 사명대사가 수축한 산성은 팔공산성(八公山城)·금오산성(金烏山城)·용기산성(龍起山城)·악견산성(岳堅山城)·이숭산성(李崇山城)·부산성(釜山城) 및 남한산성 등이다. 그리고 군기 제조에도 힘을 기울여 해인사 부근의 야로에서 활촉 등의 무기를 만들었고, 투항한 왜군 조총병을 비변사에 인도하여 화약 제조법과 조총 사용법을 가르치도록 하였다.
1594년(선조 27) 의령에 주둔하였을 때 군량을 모으기 위하여 각 사찰의 전답에 봄보리를 심도록 하고, 산성 주위를 개간하여 정유재란이 끝날 때까지 군량미 4,000여 석을 갖추도록 하였다. 선조는 사명대사의 공로를 크게 인정하여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使)의 벼슬을 내렸다. 1604년(선조 37) 2월 오대산에서 스승 휴정의 부음을 받고 묘향산으로 가던 중 왕의 부름을 받고 조정으로 가서 일본과의 강화를 위한 사신으로 임명받았다.
1604년(선조 37) 8월 일본으로 가서 8개월 동안 노력하여 성공적인 외교 성과를 거두었다. 임진왜란 때 잡혀 간 3,000여 명의 사람을 데리고 1605년 4월에 귀국하였다. 그해 6월 왕에게 복명하고 10월에 묘향산으로 들어가 비로소 휴정의 영전에 절하였다. 그 뒤 병을 얻어 해인사에서 요양하다가 1610년 8월 26일 설법하고 결가부좌한 채 입적하였다.
[사상과 저술]
7세를 전후하여 할아버지에게 『사략(史略)』을 배우고 13세 때 황여헌(黃汝獻)에게 『맹자(孟子)』를 배웠다. 1558년(명종 13) 어머니가 세상을 뜨고, 1559년 아버지가 작고하자 김천 직지사로 출가하여 신묵의 제자가 되었다. 3년 뒤 승과(僧科)에 합격하면서 많은 유생들과 교유하였다. 특히 20세 연장인 박순(朴淳)과 5세 연하인 임제(林悌)와 가까이 지냈다. 그리고 당시 재상인 노수신(盧守愼)으로부터 『노자(老子)』, 『장자(莊子)』, 『문자(文子)』, 『열자(列子 )』와 시를 배웠다. 저서로는 문집인 『사명당대사집(泗溟堂大師集)』 7권과 『분충서난록(奮忠紓難錄)』 등이 있다.
[묘소]
제자들이 다비하여 해인사 홍제암(弘濟庵) 옆에 부도와 비를 세웠다.
[상훈과 추모]
밀양의 표충사(表忠祠), 묘향산의 수충사(酬忠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