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2008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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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尹殷保 |
영어음역 | Yun Eunbo |
이칭/별칭 | 절효(節孝) |
분야 | 종교/유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효자·열녀 |
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지례면|구성면|부항면|대덕면|증산면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호동 |
출생지 | 경상북도 김천시 지례면·구성면·부항면·대덕면·증산면 일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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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려각 | 경상북도 김천시 지례면 교리 |
성격 | 효자|선비 |
성별 | 남 |
본관 | 파평(坡平) |
[정의]
조선 전기 김천 출신의 효자.
[가계]
본관은 파평(坡平). 호는 절효(節孝)이다.
[활동 사항]
윤은보(尹殷保)는 지례현[현 경상북도 김천시 지례면·구성면·부항면·대덕면·증산면 일대] 출신이다. 같은 현에 살던 서즐(徐騭)은 이천 서씨 신일의 9세손으로 자는 덕사이고, 호는 남계이다. 윤은보는 서질과 함께 아들이 없는 스승 장지도(張志道)를 친부모 모시듯 극진히 섬겼다. 지례현 출신의 장지도는 공민왕 대에 급제하여 기거주지의주사에 올랐다. 조선이 건국되자 소감(少監)에 올라 태조의 명에 따라 정혼과 함께 『정관정요(貞觀政要)』를 교주하였다. 그러나 조선 초기 골육상잔의 참극을 지켜본 장지도는 낙향하여 지례현 반곡에 머물면서 후진 교육에 전념하였다.
윤은보와 서질은 스승인 장지도가 세상을 떠나자 검은 관을 쓰고 삼띠를 두르고 시묘하여 예를 다하였다. 윤은보는 아버지가 병중일 때도 삼띠를 풀지 않고 간병하였으며, 병의 차도가 있자 다시 시묘하였다. 달포가 된 어느 날 밤 꿈을 꾸고 집으로 달려가니 아버지가 위독하였고 열흘도 채 되지 않아 돌아가시자 여막을 짓고 시묘살이를 하였다.
하루는 세찬 바람에 향합(香盒)이 날아가 찾지 못하였는데 새가 물어다 무덤에 놓고 갔다고 한다. 또한 대상일(大祥日)이 되었는데, 길에 눈이 쌓여 제수를 마련할 방법이 없어 눈물로 밤을 지내고 아침에 일어나니 호랑이가 노루를 한 마리 물어다 놓았다고 한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윤은보의 효성에 미물도 감동하였다고 감탄하였다. 후에 서질은 부모의 상을 당하자 슬픔을 이기지 못해 6년을 시묘하였다. 서질은 벼슬이 사연에 올랐다.
[상훈과 추모]
세종이 정려를 내리고 그들의 행적을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에 올리게 하였다. 김천시 지례면 교리에 정려각이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