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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인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200811
한자 李居仁
영어음역 Yi Geoin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병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1431년연표보기
활동 1472년연표보기
활동 1475년연표보기
활동 1483년연표보기
활동 1488년연표보기
활동 1493년연표보기
몰년 1507년연표보기
출생지 경상북도 김천시 양천동
성격 무신
성별
본관 성산(星山)
대표 관직 경상우도병마절도사

[정의]

조선 전기 김천 출신의 무신.

[가계]

본관은 성산(星山). 아버지는 중추부지사(中樞府知事)를 역임한 이호성(李好誠)이다. 이호성은 북정(北征)에 참여할 때 가는 곳마다 대적할 상대가 없어 비장군(飛將軍)이라 불렸다.

[활동 사항]

이거인(李居仁)[1431~1507]은 김천 하로에서 태어났다. 무과를 통해 관직에 나아갔으며, 아버지 이호성의 무예를 이어 받아 어려서부터 무예가 출중하였다. 사직의 직무를 수행하였고, 1467년(세조 13) 세조가 모화관에 나가 군사를 지휘하고 사열할 때 장용대장(壯勇隊將)이 되어 군사 112명을 거느리고 참여하였다. 같은 해 운수부수(雲水副守)가 되어 군사를 거느리고 평안도에 갔을 때 부친상을 당하였으나 기복출사(起復出仕)하였다.

1472년(성종 3) 행사직으로 왕과 윤대하였고, 경상우도수군절도사가 되었으며, 하직 인사를 올리면서 제포(諸浦)의 병선(兵船)에는 모두 화약(火藥)을 실었으나 육지에는 화약고(火藥庫)가 없으므로 두서너 간[數間] 집을 지어서 화약을 저장하게 할 것을 제의하였다. 1473년 순천부의 해적 행위를 진무하여 민심을 안정시켰으며, 1474년 삼포의 왜인들에 대해 정해진 구역 밖에 집을 짓지 못하게 하고 백성들과 단절시켜 후환을 막았다.

1475년(성종 6) 평안도의 적변 대비책의 일환으로 조전장(助戰將)에 천거되어 낙점되었고, 북변의 구령구자(仇寧口子)를 다시 설비할 것을 제의하였다. 이해 행안주목사(行安州牧使)가 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1482년(성종 13)에는 경상좌도수군절도사의 직무를 수행하면서 국방 정책의 일환으로 승려들을 쇄환하여 부족한 군액에 충당할 것을 청하기도 하였다. 이것은 군적(軍籍)을 충실하게 하고 이단(異端)을 물리치는 방안이었으나, 대체에 어두운 관리들의 공론에 의해 채택되지 못하였다.

1483년(성종 14) 성종은 제주목사로 임명하면서 보통 무리가 아니니 승정원에서 후하게 대접할 것을 지시하여 신임을 보였다. 1488년(성종 19) 청송부사(靑松府使)가 되어 민심을 안정시켰다. 1491년(성종 22) 도원수 허종(許琮)은 제장의 직임을 감당할 능력이 있는 당상관으로 이거인을 천거하였다. 이거인은 북벌 정벌의 9도장에 선발되어 북변 오랑캐 정벌에 나서 전공을 세웠다. 순천부사(順天府使)가 되었으나 정벌에서 돌아오지 않아 체직되었다.

1493년(성종 24) 전라좌도수군절도사가 되었으며, 각 지역에 필요한 여정(勵正)과 보인(保人) 수를 정하여 보고하고, 적로(賊路)의 요해지(要害地)인 각 포구에 병사를 나누어 예속시켜 방어를 충실하게 하였다. 그리고 경상도 염포에서 전라도 진도까지의 여러 포구의 첨사·만호의 방어 상황에 대해 조사하여 대비책을 마련하게 하였다. 1497년(연산군 3) 경상우도병마절도사로 제포(薺浦) 왜인 마을의 화재, 약탈 사건을 처리하여 국방과 위민 정치의 모범을 보였으나 연산군의 실정이 깊어지자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여 여생을 보냈다. 아버지가 모친을 소박(疎薄)하였다고 하나, 이거인은 도리어 지극한 효성을 보여 명성이 자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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