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2007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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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𩡘 |
영어음역 | Yi Ha |
이칭/별칭 | 면여(勉餘),양계(陽溪)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병우 |
출생 | 162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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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 1651년 |
활동 | 1654년 |
활동 | 1675년 |
활동 | 1676년 |
활동 | 1677년 |
몰년 | 1688년 |
출생지 | 경상북도 김천시 감문면 |
유배|이배지 | 함경남도 삼수, 흥양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성산(星山) |
대표 관직 | 형조참의 |
[정의]
조선 후기 김천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성산(星山). 자는 면여(勉餘), 호는 양계(陽溪). 아버지는 개령(開寧)에 세거지를 둔 이상규(李尙規)이고, 장인은 황준경(黃浚瓊)이다. 셋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형으로 이함(李馠)과 이암(李馣)이 있고, 아우로 이필(李馝)과 이발(李馞)·이의(李薿)가 있다.
[활동 사항]
이하(李馥)[1626~1688]는 지금의 김천시 감문면 삼봉에서 태어나, 가학을 전수받았다. 성장하여서는 송암 이구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닦고, 미수 허목(許穆)에게 예학을 공부하였다. 한때 개령의 토적(土賊) 무리와 어울려 죽을 뻔하였는데, 이 일이 걸림돌이 되어 청직(淸職)의 진출에 어려움을 겪었다.
학문에 대한 태도가 진지하고 궁극에 이르는 성미로 경사(經史)에 박통하였고, 예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1651년(효종 2) 생원시에 합격하고, 29세가 되던 1654년(효종 5) 갑오 식년시에 갑과 2위로 급제하였다. 직장(直長), 안동교수(安東敎授), 성균관전적, 사헌부감찰, 예조정랑(禮曹正郞)을 거쳐 사헌부의 지평과 장령이 되었다. 1660년(현종 1) 송시열(宋時烈)과의 예송 논쟁에 뛰어들었으나 실패하였다. 1663년(현종 4) 만경현감을 역임한 후 벼슬에서 물러나 학문과 저술에 몰두하였고, 이때 덕원서원을 창설하여 김천의 흥학 육영에 힘썼다.
1669년(현종 10) 강진현감에 재직할 때 송사의 일로 법을 무시하고 함부로 형벌을 사용하여 사람을 죽였다고 탄핵을 받았으나 실상이 아님이 밝혀지기도 하였다. 1675년(숙종 1)부터 사헌부장령이 되어 치적을 남겼다. 이때 송시열을 절도(絶島)에 안치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으며, 윤휴(尹鑴)가 방자하여 거리낌 없이 현란(眩亂)한 말을 한다고 주청하여 잠시 면직되었으나 곧 사헌부장령으로 복직하였다. 다음 해에 인선왕후(仁宣王后)를 태묘에 부할 때 고묘(告廟)하고 조사기(趙嗣基)를 파직할 것을 청하였다.
1676년(숙종 2) 동래부사가 되어 일곱 가지 약조를 가지고 도주(島主)에게 왕복하여 타결한 뒤에 경계를 정하고 표(標)를 세우는 공적을 남겼다. 다음 해 불탄 동래의 왜관을 위해 공미 150석을 주어 왜인을 위무하였다. 그러나 이때 사간원은 이하가 속요를 어제라고 하였다는 죄목을 들어 탄핵하였다. 1679년(숙종 5)까지 동래부사로 치적을 남기고 승정원동부승지가 되어 중앙으로 올라왔다. 형조참의에 올랐으나 반대파로 구성된 삼사에 의해 복창군 이정·복성군 이남·윤휴·오정창(吳挺昌)의 당파로 몰리고 행동하는 자취가 아주 매우 흉악하고 비밀스러웠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아 함경남도 삼수로 귀양 갔다. 이후 흥양으로 이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저술]
저서에는 『대동유현록(大東儒賢錄)』, 『삼강문고(三江文稿)』, 『사주쌍변(四周雙邊)』, 문집에는 『양계선생문집(陽溪先生文集)』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