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2006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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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明均簡札 |
영어음역 | Yi myeonggyun Ganchal |
영어의미역 | Letters of Yi Myeonggyun |
분야 | 역사/근현대,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문헌/문서 |
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남권희 |
[정의]
개항기 김천 출신의 독립 운동가 이명균(李明均)이 사돈에게 쓴 간찰(簡札).
[개설]
이명균[1863~1923]은 1915년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内正毅] 총독이 해인사를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고 편강렬(片康烈)과 함께 암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한 후, 편강렬을 40일간 숨겨 주었다가 만주로 망명하게 했다. 3·1운동 때 경상도의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고, 1920년 신태식·정순영과 함께 대한독립후원의용단(大韓獨立後援義勇團)을 조직하여 다섯 차례에 걸쳐 상해임시정부에 10만 원을 송금했다. 1922년에 이 사건이 발각되어 독립군 자금 8만 3000원을 빼앗기고 잡혔다가 이듬해 예심 도중 병이 악화되어 석방된 후 죽었다.
현재 육군박물관에 이명균의 간찰 두 건[유물 번호 084072, 08406]이 소장되어 있는데, 두 건 모두 1894년 3월 23일에 이명균이 사돈에게 쓴 것으로, 작성 동기와 내용도 비슷하다. 혼례 후 신행을 가는 아들과 며느리 편에 사돈에게 보내는 인사 편지로, 좋은 며느리를 맞이하게 된 것이 집 안의 경사임을 감사히 여기고, 답례품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음을 부끄럽게 여기는 한편, 보잘 것 없는 아들을 잘 지도해 주기를 바라는 내용과 아들을 너무 오랫동안 붙잡아 두지 말고 일찍 보내 주기를 바라는 내용이다.
[형태]
두 건 중 한 건[유물 번호 084072]은 가로 48.8㎝, 세로 33㎝의 종이에 18줄의 초서체로 썼다. 다른 한 건[유물 번호 084068]은 가로 37.2㎝, 세로 23.2㎝의 종이에 13줄의 초서체로 썼다.
[구성/내용]
한 편지[유물 번호 084072]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평소 존경하던 분과 사돈으로 맺어진 것을 영광으로 여기고, 또 덕 있는 정숙한 며느리를 얻은 것이 가문의 경사로 여기고 있다. 혼례 때 좋은 예물을 받았지만 제대로 답할 것이 없어 송구스럽고, 아들은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였으니 잘 살펴 주기를 바라는 등 매우 겸손한 표현으로 글을 썼다.
다른 편지[유물 번호 084068]는 위의 편지와 같은 날 같은 동기로 작성된 것이다. 그 내용은 “며칠을 함께 지내면서도 제대로 얘기 못하고 작별하니 슬픈 마음이 심합니다. 밤사이에 어머님께서는 평안하시고 대소가가 모두 평안하신지 궁금함을 못 견디겠습니다. 저는 어제 집에 돌아와 별일 없고, 다행히 대소가가 평안합니다. 며느리는 현숙하여 시집온 지 5일된 신부 같아서 잊을 수가 없습니다. 또 예절이 밝으니 모든 일이 되기를 바랍니다. 답례품은 고루 갖추지 못하니 부끄럽습니다. 아이는 너무 오래 머물게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예를 갖추지 못합니다. 갑오 3월 23일 사돈 이명균”이다.
[의의와 평가]
「이명균 간찰(李明均簡札)」은 독립 운동가인 이명균의 간찰로 대한 제국기의 혼례 풍습을 살필 수 있는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