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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대로 창의비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200669
한자 呂大老倡義碑
영어음역 Yeo Daeryo Changuibi
영어의미역 Yeo Daero Patriot Monument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비
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구성면 송죽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주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관련 인물 생년 1552년연표보기
관련 인물 몰년 1619년연표보기
현 소재지 경상북도 김천시 구성면 송죽리 지도보기
성격 유허비
관련 인물 여대로(呂大老)
재질 오석
크기(높이, 너비, 두께) 210㎝[높이]|75㎝[너비]

[정의]

경상북도 김천시 구성면 송죽리에 있는 조선 후기의 문신 여대로의 창의비.

[개설]

여대로(呂大老)성산여씨 여응구(呂應龜)의 아들로 1552년(명종 7) 구성면에서 태어났다. 호는 감호(鑑湖)이다. 1582년(선조 15) 사마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문과에 급제하였다. 임진왜란 때에 고향에서 집안의 노복과 마을 사람들을 거느리고 의병을 일으켜 김면(金沔), 곽재우(郭再祐), 권응성 등과 지례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이후 초유사(招諭使)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의 천거로 형조랑(刑曹郞)에 올랐고, 이내 지례현감에 제수되어 의병장을 겸하여 낙동강 서쪽의 여러 고을을 다스렸다.

1594년(선조 27)에 의성현령, 1600년(선조 33) 이후에 예조좌랑·병조좌랑·충청도사·고산찰방·대구판관·종묘서령(宗廟署令)·성균관직강·예조정랑·사헌부지평 등을 지냈다. 1607년(선조 40) 합천군수가 되었을 때 정인홍(鄭仁弘)의 행위를 반대하여 파직되었고, 이이첨(李爾瞻)의 원한을 사서 요직에 오르지 못하였다. 정인홍광해군 옹립 등의 문제로 고향에 돌아와 있던 중 1619년(광해군 11) 세상을 떠났다. 경양사(鏡陽祠)에 배향되었다.

[건립 경위]

여대로 창의비는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왜군과 싸운 여대로의 공적을 기리고자 왜군과 전투를 벌인 곳에 후손들이 세웠다.

[위치]

송죽리 송죽휴게소에서 약 200m 떨어진 국도변에 있다.

[형태]

크기는 높이 210㎝, 너비 75㎝이며 재질은 오석이다.

[금석문]

여대로 창의비 비문은 여대로의 공적을 기리고 혼을 위로하는 글로, 내용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맑고 맑은 감천은 쉬지 않고 흘렀다. 이곳 옛 전쟁터에 빗돌을 높이 세워 만민이 우러르니, 아아 감호 여 선생, 나라 위한 붉은 충혼, 오늘도 상양하리. 길이길이 돌보시어 호국신이 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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