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2005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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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敎會聯合示威 |
영어음역 | Gyohoe Yeonhap Siwi |
영어의미역 | Church Association Demonstration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일수 |
[정의]
1919년 3·1운동이 전국으로 확대되는 과정에서 경상북도 김천시의 천주교와 기독교 신자들이 벌인 독립운동.
[역사적 배경]
우리 민족은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받으면서 ‘충량한 신민의 양성’을 목표로 한 지배 정책과 식민지 수탈을 기조로 하는 경제 정책으로 인해 많은 고통에 시달렸다. 제1차 세계 대전을 전후하여 러시아 혁명이 발발하고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 자결주의가 제창되었다. 이런 국내외적 정세는 민족의 독립에 대한 필요성과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에 따라 1919년에 접어들면서 국내외에서 독립을 위한 운동이 빈번하게 발생하였고, 3월 1일을 기해 전 민족적인 만세 독립운동이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김천은 일제의 한국 침략의 상징이 된 경부선 철도가 부설되면서 만들어진 신흥 도시로 경북 내륙의 주요 산물이 모여들었다가 다시 대구와 부산을 거쳐 일본으로 이어지는 일제의 경제적 침탈의 파이프 역할을 하는 요충지였다. 이러한 지역적 특성을 이용하여 만세 독립운동이 발발하는 주요 계기를 마련하였다.
[경과]
김천군 황금동[현 김천시 황금동] 황금동교회의 시위가 적발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천주교와 기독교 신자들은 만세 독립시위를 벌이기로 하였다. 이들 종교인들은 3월 20일 밤 대항면 운수리에 있는 황악산에서 피어오르는 봉화를 신호로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 만세를 고창하면서 만세 시위를 벌이기로 계획하였다.
[결과]
시내에는 일제 관헌의 경비가 삼엄하여 한 장소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기 어려웠다. 그리하여 종교인들은 시내 곳곳에서 일본 경찰의 탄압을 피하며 밤늦도록 산발적인 시위를 벌였다. 이 시위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탄압받은 사람은 없었다.
[의의와 평가]
김천군 종교인들의 교회연합 시위는 민족 독립의 필요성을 확인케 하였고, 이후 김천에서 만세 독립운동이 확산되는 계기를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