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2005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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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泉面協議會 |
영어음역 | Gimcheonmyeon Hyeobuihoe |
영어의미역 | Gimcheon-myeon Association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일수 |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북도 김천 지역에 일제가 설립한 면정 자문 단체.
[개설]
면 협의회는 3·1운동 이후 일제가 한국인의 민심을 수습하기 위한 회유책으로 실시한 문화 정치의 일환으로 면정의 자문을 위해 설립한 단체이다. 즉 3·1운동 이후 일제가 헌병 경찰제와 회사령을 폐지하고 문화 통치를 실시하면서 독립 만세 운동에서 나타난 한국인의 독립 의지와 민심을 수습하기 위한 회유 조치의 하나로 등장하였던 것이다. 이에 1923년, 1926년, 1929년에는 각각 부·면 협의원들의 선거가 치러졌으며 1931년, 1935년, 1939년, 1943년에는 부·읍회와 면협의회 선거가 실시되었다.
[변천]
김천은 1917년 10월 1일부터 조선총독부에 의해 특별면으로 지정되었고 한국인 면장 대신에 일본인 면장을 두게 되었다. 특별면의 요건으로는 상공업자 500호 이상이 거주하고 호당 평균 면경비 7원 이상을 부담해야 했는데 당시 경상북도 내의 특별면은 김천을 비롯하여 영일군 포항면이 있었다.
김천의 일본인 사회는 지방 출신 인물이 면장이 되길 원했으나 기대와는 달리 지방과는 관련이 없는 스즈오카 세이이치[鈴岡正一]이 취임하였다. 면장의 상담역으로는 모리모토 오토지로[森本音次郞], 기이 고레타카[城井惟隆], 황필주(黃苾周), 추응천(秋應天) 등이 임명되었다.
그러나 1920년 면제 개정으로 면상담역 제도가 없어지고 대신 18명으로 구성되는 면 협의회를 설치하도록 하였다. 이에 김천면에서는 1920년 11월 20일에 제1회 김천면 협의원 선거가 실시되어 한국인 5명과 일본인 5명이 당선되었다. 당시 당선자는 추응천(秋應天), 김성문(金聖文), 김석배(金石培), 장수장(張秀章), 이토 기쿤[伊藤季薰], 한다 몬키치[半田紋治], 모리모토 오토지로[三本音次郞], 야마모토 겐조[山本元藏], 스지 스테조[逵捨藏], 야나기타 시게타로[柳田磁太郞] 등이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김천면 협의회 설립을 계기로 김천의 숙원 사업이던 공공 병원 유치 문제가 해결되었다. 면 협의회와 학교 조합 의원들이 경상북도지사에게 5만 원에 해당하는 병원 부지와 지역민 부담 조건으로 병원 건립과 운영을 도에서 맡아 달라는 내용의 청원을 제출하였다. 이 청원이 받아들여져 1922년 10월에 착공하여 1923년 6월에 준공된 것이 도립김천병원[현 경상북도 김천의료원]이었다. 결국, 경상북도 김천의료원은 김천 지역민의 발의와 재정 조달로 이루어진 사업이었다.
김천면 협의회의 당면 문제로 시장 정리 사업이 있었다. 감천제방이 축조되는 과정에서 9,917㎡의 면 채비지가 조성되었다. 때마침 시장 취체 규칙이 공포되자 시장 정리 방안이 제시되었다. 지금까지 무질서하게 조성된 시장 중에서도 감호동 쪽의 시장을 이 규칙에 따라 일정 구역으로 하정하고 해산물과 채소 상인을 새롭게 조성된 부지에 모으자는 것이었다. 이는 김천면 협의회 의원 10명 중 7명이 찬성하는 안이었다.
그러나 일본인 면장 시바사키가 태도를 바꿔 김천면 협의회 소집을 지연시키면서 시장 정리 방안의 무력화를 꾀하였다. 이에 대해 김천면 협의회 의원들이 군수를 동원하여 안의 추진을 시도하자 면장이 사임하기에 이르렀다. 이즈음 1923년 11월에 다시 김천면 협의회 의원 선거가 있었다. 12명 정원에 한국인 20명, 일본인 10명이 입후보했으며 선거 결과 황건수(黃建秀), 이경일(李慶一), 이상인(李相寅), 배상윤(裴尙潤), 이토 기쿤[伊藤季薰], 야마모토 겐조[山本元藏], 스지 스테조[逵捨藏], 후쿠오카 나오스케[福岡直助], 마사이 히데유키[正井秀之], 다카사키 헤이키치[高崎平吉] 등이 당선되었다.
이때 특별면장으로 일본인 와타나베 에이타로[渡邊榮太郞]가 부임했으나 시장 정리, 상수도 및 하수도 시설, 면사무소 회의실 증축 등과 관련된 예산 편성 과정에서 성의 없는 태도를 보여 김천면 협의회와 갈등을 불러 일으켰다. 특히, 시장 정리 사업은 경제적 이해관계가 걸린 사안이었고 따라서 김천면 협의회 의원과 면장과의 갈등은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와타나베 에이타로 면장이 자신 소유의 토지가 많은 도립김천병원 앞에 시장을 집결시키고자 하면서 문제가 해결된 듯이 보이던 시장 정리 사업이 김천군의 주요 사회 문제로 다시 부각되었던 것이다.
갈등은 김천면 협의회가 면장의 태도에 대한 책임을 물어 불신임까지 하는 문제로 확대되었다. 김천면 협의회 의원 12명 중 불신임 편 10명이 예산 심의를 거부하고 강경하게 나자 와타나베 에이타로도 물러서지 않은 채 대립하였다. 이에 1925년 봄 중립파 김천면 협의회 의원들이 김천의 조선관에서 시민대회를 열었고 이후 재차 불거진 시장 정리 문제는 경제적 이해관계를 가진 김천면 협의회 의원들의 사퇴와 면장 해임으로 귀결되었다. 이어 와타나베 에이타로 후임 면장이 어시장과 채소시장을 원안대로 채비지로 집결시킴으로써 시장 정리 문제가 해결되기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