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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200479
한자 金山杖義軍
영어음역 Gimsanjang Uigun
영어의미역 Gimsan Militia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김호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설립 1896년 1월 22일연표보기
성격 독립운동 단체

[정의]

개항기 경상북도 김천 지역에서 활동한 의병 부대.

[개설]

1894년에 일어난 동학 농민 운동으로 인해 청일 전쟁과 갑오개혁이 일어났다. 그 과정에서 일본은 조선 침략의 야욕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1895년 8월 일본에 의해 을미 명성왕후 시해 사건이 있었고, 11월에는 단발령이 내려졌다. 이에 각지의 유림들이 일본을 몰아내고 국권을 회복하려는 의병 운동을 일으켰다. 이에 호응하여 김천 지역에서도 여중룡이 중심이 되어 국권을 회복하려는 의병 운동을 일으켰다. 그 전말이 여중룡의 『남은유집(南隱遺集)』에 기록되어 있다.

[설립 목적 및 변천]

『남은유집』에 의거해 ‘김산장의군’의 창의와 활동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895년에 을미의병이 전국적으로 일어났지만 상주·선산·김산·성주에서는 창의가 없었다. 이를 애통히 여긴 여중룡이 같은 해 12월에 족질 여영조와 상의하여 김산군 북부[김산향교 관내] 각 동에 통문을 보내 김산향교에 모일 것을 촉구하였으나 지사들이 향교에 모이지 않았다. 이듬해 1월 다시 각 읍에 통문을 보내 김산향교에 모일 것을 촉구하여 1월 22일 향교에서 관민의 추앙을 받는 정운채를 의병군의 통수자로 추거하기로 하고 그 의향을 묻기로 했다.

이때 유도섭이 찾아와 조동석·이기찬·허위·강심형·양재안·이가하 등이 상주에서 창의하려고 하였으나 성사되지 못했음을 전하였다. 그리고 지금 김천에 유숙하면서 40~50명의 포정을 확보하고 포수 수백 명을 거느리고 개령의 허위경과 함께 김산 무기고에서 무기를 거두어 황간으로 나아가 군기를 세워 진을 치면 영동·옥천에서도 동참하기로 약속되어 있으니 같이 협력하여 거사하자고 하였다.

여중룡은 그들이 군자금이 마련되어 있지 않았고, 개령과 선산에서 온다던 포수도 오지 않아 거사를 못할 것을 염려하여 주저하다가 결국 함께 하기로 하였다. 이어 의병장을 이기찬으로 하여 조직을 갖추었으며 이기찬은 단에 올라 서차와 행군 규칙을 설명하고 ‘김산장의대장’이라고 크게 쓴 대장기를 세웠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향교에서 창군한 의병군은 읍내에 있는 장교청으로 이진하고 장병은 각 관청에 분산 숙식했다. 군비는 김산군의 세무관으로 있던 여영근이 2,000량을 마련해 우선 충당하고 김산군의 하리 백채기를 설유하여 김산군 무기고에서 군기를 거두어 김천역으로 이진하였다. 오후에는 노곡[농소면]으로 다시 옮겼다가 해질 무렵 지례로 행군하여 그곳에 투숙하였다.

이른 아침 사방 문에 참군 응모를 호소하는 격문을 붙이고 지례현감 이주필을 수방장으로 추거했으나 불응하였다. 대신 관 포군을 의병군에 보내니 모군에 응하는 자가 많아져 군세를 떨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운량도감이 군량 조달을 제대로 해주지 않아 의병들이 굶주리기도 했다. 이어 관찰사 이중하가 보낸 관병 수백 명이 지금 김천에 와 있는데 오래 지나지 않아 지례에 당도할 것이라는 전갈을 받자 훈련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는 제대로 대적할 수 없어 후일을 기약하고 흩어졌다.

십 수일 후에 김산장의군은 재거의 뜻을 갖고 황간에서 다시 모집하여 구성으로 이진한 후 곧바로 홍심동[부항면 대야리]으로 군진을 옮겨 진용을 정비하였다. 그리고 대구 관군이 의병군을 공격하려고 구성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선제 공격을 위해 중군 양제안이 100여 명을 이끌고 봉곡 조룡[대덕면]을 거쳐 야반에 관군이 있는 구성에 도착하였다. 의병장 이기찬도 수백 명의 군병을 배불리 먹이고 구성을 향했고 야반에 희곡[부항면]에 당도하였다.

이렇게 하여 대구 관군의 선봉대가 일제히 발포하였고 의병군도 응사하면서 혼전이 벌어졌으나 수가 많은 관군을 당해낼 수 없었다. 군병을 수습하여 산곡으로 후퇴하면서 태반이 도주하였고, 수십 명만 남아 홍심동에 돌아오니 진을 지키고 있던 이주필이 앞으로 화가 미칠 것이니 집에 돌아가 신주를 묻고 피신하자고 했다. 남은 의병들은 호서의 여러 군진에 합세하였다. 한편 허위는 황간에서 흩어진 의병을 다시 모아 진천에서 거사하려고 떠났다가 왕명을 듣고 의병을 해산하였다.

『남은유집』과는 달리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김천·성주 등지에서는 허위·이기찬·이은찬·조동호·이기하 등의 의거가 있었다. 우국 강개의 뜻을 품은 허위 등은 각처에서 유림들을 중심으로 한 의병 봉기 활동이 있음을 보고 거사를 결의하다. 1896년 김천 장날을 기해 김천읍으로 들어가서 장정 수백 명을 모집한데 이어 무기고를 차지하여 무기와 군수품 등을 손에 넣고 각 고을에 격문을 보내 군사를 모집하여 김산장의군을 일으켰다. 그리고 김산·성주 두 곳에 군사를 나누어 진을 치고 서로 호응하여 대구부로 진격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이 소식을 들은 대구부 관군이 급히 출동하여 먼저 성주진을 습격하고 공주의 관군과 연합하여 대공세를 펴자 두 진이 무너졌으며 이기찬 등 일부 장령은 관군에게 체포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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